항목 ID | GC042052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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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時燁 |
영어음역 | Gim Siyeop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중앙대로203번길 15[초량동 509]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 1904년 부산 기장에서 김두수(金枓首)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산 지역에서 노동 운동과 청년 운동을 했던 김주엽(金周燁)이 친형이고, 김도엽(金度燁)·김규엽(金圭燁)과는 재종형제 사이이다. 또 독립운동가 김두봉(金枓奉)은 5촌 당숙이며 김약수(金若水)[본명 김두전]도 일가 숙부이다. 박차정(朴次貞)과도 내재종형제 사이이다.
[활동 사항]
김시엽(金時燁)은 부산 지역에서 노동 운동과 청년 운동 등 사회 운동 부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28년 3월 18일 부산노우회 제7차 정기 대회에서 집행부로 선출되고 이승엽·상무근과 함께 조사부를 맡았다. 1929년 4월 30일 제8차 정기 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부산합동노동조합으로 회명이 개칭된 이후에도 간부로 활동하였다. 또한 부산청년동맹에서도 1929년 4월 집행위원장 대리, 1929년 10월 21일 중부지부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한편, 신간회 부산지회에도 관여하여 1929년 2월 12일에 간사로 선출되었다.
부산합동노동조합 간부였던 김시엽은 1930년 1월 10일 조선방직회사 동맹 파업 때 다수의 파업 지지 격문을 조선은 물론 일본 각지 노동 단체에 발송한 사건으로 체포되어, 같은 해 3월 15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언도받았다.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동일한 형량 확정을 거쳐, 부산형무소에서 복역하고 1930년 12월 30일에 만기 출옥하였다.
그러나 1932년 1월 7일에 1월 1일 부산 시내에 산포된 반제 반전 격문 사건으로 다시 검거되어 취조를 받고 1월 25일 석방되었다. 1932년 2월 김시엽의 집에 와 있던 김도엽이 체포되면서 같이 연행되어 또 한 차례 부산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때 함께 체포된 사람이 부산합동노조 간부인 임국희(林國熙)·양노산(梁◯山), 부산노동회 간부 안상교(安尙敎)·김성태(金性泰) 등인 것으로 미루어 ‘적색 노동조합 운동’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32년 4월 메이데이 삐라 사건으로 부산 사회단체 회관을 수색한 경찰은 다시 김시엽 등 사회단체 관계자를 검속하였다. 이처럼 김시엽은 일제 강점기 동안 줄곧 일본 경찰의 감시 하에 있었다.
해방 후 전국노동조합평의회[약칭 전평]에 부산 지역 대의원으로 참석하였고, 전국노동조합평의회 부산지방평의회 책임자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1948년 8월 21일에서 26일에 열린 ‘해주 남조선 인민 대표자 대회’에서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9년 전후 남한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