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4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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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枓奉 |
영어음역 | Gim Dubong |
이칭/별칭 | 백백연(白淵),백련(帛連),태항산 호랑이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87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서용태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한글 학자이며 정치인.
[가계]
호는 백연(白淵)·백련(帛連). 별명은 태항산 호랑이. 아버지는 김돈홍이다. 기장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약수(金若水)가 사촌이다. 신간회와 의열단에서 활동한 항일 운동가 박문희(朴文熺)·박문호(朴文昊)·박차정(朴次貞)은 김약수의 5촌 조카이고, 박차정과 결혼한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은 조카사위이다. 박차정의 작은 아버지인 항일 운동가 박일형(朴日馨)은 사돈이다. 이외에 기장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도엽(金度燁)·김규엽 형제, 김시엽(金時燁)·김주엽(金周燁) 형제도 5촌 조카이다. 동래소년동맹에서 활동한 김응엽도 일가 조카이다.
[활동사항]
김두봉(金枓奉)[1889~?]은 1889년 2월 16일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87번지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엄격한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고 아버지 밑에서 한문과 한학을 배웠으며 일본인이 세운 보통학교에 입학하기를 거부하였다. 청년이 된 김두봉은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신학문을 배워야 된다고 생각하여 1908년 단신으로 상경하여 기호학교(畿湖學校)[중앙고등보통학교의 전신]에 입학한 뒤 배재학당(培材學堂)으로 옮겨 공부하였다.
1913년 배재학당을 중퇴한 이후 한글 학자인 주시경(周時經)의 수제자가 되어 국어사전 『말모이』 편찬에 참여하였고, 1916년에는 『조선말본』을 저술하였다. 1917년 보성학교를 시작으로 휘문고등보통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 등에서 우리말을 가르쳤다. 1917년 이화학당 출신의 아내와 29세의 늦은 나이에 결혼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며 시위에 참여하였고 이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김두봉은 1919년 7월 개회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임시 의정원에서 경상남도 대표로 의원에 선출되었고, 상하이 교민단이 설립한 인성학교에서 1928년부터 1932년까지 교장을 맡았다. 1930년 1월 한국독립당의 창당에 참여하였다. 1935년 7월 김원봉과 함께 한국민족혁명당을 창당하였고 중앙 집행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종일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이념적 차별을 넘어 항일 투쟁의 통일 전선을 구축하는 일에 몰두하였으며, 이를 위해 중국 국민당은 물론 중국 공산당과도 연대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1942년 4월 연안으로 가서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여 주석이 되었고, 조선의용대 화북 지대를 개편하여 조선의용군을 조직하였다. 이 무렵 중국 공산당이 항일 투쟁의 중심이 되자 김두봉은 조선의용군, 조선독립동맹을 이끌고 중국 공산당 팔로군과의 연대 속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김두봉은 일본이 패전하자 평양으로 들어가서 1946년 2월 조선신민당을 결성하여 당수로 선출되었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어 정치 일선에 나섰다. 1946년 8월에 조선노동당 위원장, 10월에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총장이 되었다. 1948년에는 헌법제정위원회 위원장으로 북한의 헌법 제정 작업에 참여하였으며, 1948년 4월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김일성(金日成)과 함께 남북 정치 협상에 참여하여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남북 분단이 결정되자 북한 정권에 참여하였다. 이후 북조선인민위원회 의장,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 및 상임 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국가수반이 됨으로써 독립운동가 김두봉은 남한의 항일 투쟁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금기시된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정치인 김두봉의 역정 또한 순탄하지는 않았다. 김두봉의 정치 활동에서 기반은 중국 공산당과 연대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한 집단으로 중국파 또는 연안파라 불리었다. 1956년 연안파 간부들이 김일성의 권력 장악을 비판한 이른바 8월 종파 사건이 발생하자, 연안파의 거두인 김두봉은 반혁명 종파 분자로 공격받게 되었다. 그 결과 1958년 3월 조선노동당에서 제명됨과 동시에 권력에서 숙청되었다. 고령과 항일 운동의 공적을 이유로 사형은 모면하였으나 지방의 협동 농장에서 노역에 종사하며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탁월한 한글 학자이며 평생을 조국 독립에 바친 항일 투사 김두봉은 1960년 전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있지만 항일 투쟁의 지도자로서 김두봉 정도의 위상을 가진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지만 김두봉은 냉전과 남북 분단의 상황 때문에 남과 북 어느 쪽에서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독립 유공자로 선정되었음에도 1962년과 1963년, 1977년의 독립 유공자 공적 심사에서 서훈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수반을 지냈다는 등이 이유였다. 하지만 2000년 이후 학자들을 중심으로, 김두봉이 북한 정권에 참여한 것과 별개로 서훈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냉전이 해체된 현재 시점에서 이념을 떠나 김두봉이 남긴 업적에 대해서는 정당한 평가를 내려야 할 것이다.
[저술 및 작품]
1913년에 주시경의 『말모이』[국어사전] 편찬에 참여했고 1916년에 『조선말본』을 저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