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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391
한자 金度燁
영어음역 Gim Doyeop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읍내로94번길[대라리 436]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고려공산청년회 회원
출생 시기/일시 1899년 7월 29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5년 9월 -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28년 5월 -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17년 - 기장광복회 활동으로 체포됨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5일 - 기장면 3·1 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1일 -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
활동 시기/일시 1919년 6월 11일 -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 받음
활동 시기/일시 1924년 - 북풍회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25년 4월 - 고려공산청년회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28년 8월 - 러시아에서 귀국
활동 시기/일시 1928년 9월 - 1차 조선 공산당 사건 관련자로 체포됨
활동 시기/일시 1930년 6월 - 1차 조선 공산당 사건으로 2년 6월형을 선고 받음
활동 시기/일시 1931년 10월 31일 - 석방
활동 시기/일시 1932년 2월 19일 - 부산경찰서에 구금
활동 시기/일시 1932년 - 조일반제공동투쟁동맹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33년 1월 - 조선반제동맹 경성지방조직준비위원회 사건으로 체포됨
활동 시기/일시 1934년 8월 24일 - 병보석으로 출감
활동 시기/일시 1934년 12월 28일 - 신병으로 공판 정지
몰년 시기/일시 1937년 10월 6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2년연표보기 - 건국 훈장 애국장 추서
관련사건 시기/일시 1917년연표보기 - 기장광복회 사건
관련사건 시기/일시 1919년 4월 5일연표보기 - 기장면 3·1 운동
관련사건 시기/일시 1930년 6월연표보기 - 조선 공산당 사건
관련사건 시기/일시 1933년 1월연표보기 - 조선반제동맹 경성지방조직준비위원회 사건
출생지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대라리 436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대라리 436
학교|수학지 보명학교 - 부산광역시 기장군지도보기
학교|수학지 동방노력자공산대학 - 러시아 모스크바
활동지 기장 장터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306-9지도보기
활동지 북풍회 - 서울특별시
활동지 고려공산청년회 - 서울특별시
활동지 부산광역시
활동지 조선반제동맹 경성지방조직준비위원회 - 서울특별시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김해. 아버지는 김두복(金枓馥)이고, 어머니는 송영숙(宋永淑)이다. 기장 지역 노동 운동과 청년 운동에 앞장선 김규엽(金圭燁)이 친동생이며 김시엽(金時燁)·김주엽(金周燁)은 육촌 형제이다. 또 독립운동가 김두봉(金枓奉)은 오촌 당숙이며 김약수(金若水)[본명 김두전]도 일가 숙부이다. 박차정(朴次貞)은 내재종형제[할아버지의 여자형제의 손자]이며 기장·양산 일대에서 여성 운동을 한 권은해(權銀海)는 사돈이다. 일제 강점기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집안임을 알 수 있다.

[활동 사항]

김도엽(金度燁)[1899~1937]은 1899년 7월 29일에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대라리 436번지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도엽은 어릴 적에 권은해의 아버지 권상중(權商重)이 설립한 기장 보명학교를 다녔고, 비밀 결사 기장광복회에서 활동하였다. 기장광복회의 회장은 김약수였고, 대부분의 회원이 기장 지역의 청년이었다. 김도엽기장광복회에 가입한 시기가 언제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917년 기장광복회가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을 당시 회원으로 체포되었다. 이때 김약수는 도피하여 화를 면하였으나, 명정학교 교장이자 기장광복회 총무였던 박세현(朴世鉉)은 체포되어 부산형무소에서 옥사하였고, 김도엽오기원(吳基元) 등 청년 10여 명도 경찰에 잡혀가서 신문을 받았다.

깁도엽은 1919년 기장면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전국으로 확산되는 3·1 운동 소식과 동래 장터의 3·1 운동 소식이 기장에 전해질 무렵 때마침 서울의 모 신문사에 다니던 김수룡(金壽龍)이 김도엽·권철암(權鐵巖)·구수암(具壽巖)·최기복(催基福)·이택규(李澤奎)·박공표(朴孔杓)·오기원 등 기장 지역 청년들에게 독립 선언서를 전달하였다. 이들은 4월 5일 기장 장날 오전 11시로 거사 일정을 정하고, 기장면사무소에 근무하는 최창용(崔昌鎔)을 통해 기장면사무소의 등사판과 등사 원지를 빌려 옛 기장 장관청(將官廳) 등에서 독립 선언서를 등사하였다.

4월 5일이 되자 김도엽은 ‘양심발원(良心發源) 인도적 자유 민족’과 ‘조선 독립 만세, 조선독립단’이라고 대서특필한 큰 깃발을 들고 기장 장터에 도착해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며 기장면 3·1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1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6월 11일 징역 2년 6월형이 선고되었다. 다시 고등 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김약수의 영향으로 1924년에 결성된 공산주의 사상 단체 북풍회에 가입하였고, 1925년 4월에 결성된 조선 공산당의 청년 단체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였다. 1925년 9월경 고려공산청년회의 파견 학생으로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였다. 1928년 5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고, 8월에 귀국하였다. 1928년 8월 20일 평양에서 활동하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출신 정석행이 검거되면서, 김도엽도 고향에 내려와 있던 9월경 1차 조선 공산당 관계자로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이후 평양경찰서에 구금되어 조사를 받고 1930년 6월 평양지방법원에서 2년 6월형을 선고 받았으며 1931년 10월 31일에 석방되었다.

기장으로 돌아온 김도엽은 1932년 2월 또 다시 체포되어 부산경찰서에 구금되었다. 함께 체포된 사람이 부산합동노조 간부 김시엽·임국희(林國熙)·양노산[梁◯山][◯은 불명], 부산노동회 간부 안상교(安尙敎)·김성태(金性泰) 등인 것으로 미루어 적색노동조합 운동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1932년 김도엽이관술·이순금 등과 함께 일본 학생들을 규합하여 조일반제공동투쟁동맹(朝日反帝共同鬪爭同盟)을 조직하였다. 김도엽은 1933년 1월 경성에서 조선 공산당 재건 운동 단체인 조선반제동맹 경성지방조직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적색노동조합 운동을 전개하던 중에 체포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되어 공판을 진행하던 중에 폐병이 너무 심각하여 1934년 8월 24일 병보석으로 출옥하였고, 12월 28일 공판 정지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구금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결국 1937년 10월 6일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2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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