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4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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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基元 |
영어음역 | O Giwo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읍내로94번길 18[대라리 437]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아버지는 오경천(吳敬天)이다.
[활동 사항]
오기원(吳基元)[1897~1940]은 1897년 12월 12일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대라리 437번지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기장 보명학교를 다녔고, 이후 기장에 있는 차성상회의 관리인으로 있으면서 비밀 결사인 기장광복회에서 활동하였다. 1917년 기장광복회가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을 당시 회원으로 체포되어 김도엽(金度燁)·오신근(吳信根) 등 청년 10여 명과 함께 심문을 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오기원은 1919년 기장면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전국으로 확산되는 3·1 운동의 소식과 동래 장터의 의거 소식이 기장에 전해질 무렵에 때마침 서울에서 기장면 교리 출신인 김수룡(金壽龍)이 오기원을 비롯한 김도엽·권철암(權鐵巖)·구수암(具壽巖)·최기복(催基福)·이택규(李澤奎)·박공표(朴孔杓) 등 기장 지역 청년들에게 독립 선언서를 전달하였다. 독립 선언서를 전해 받은 이들은 4월 5일 기장 장날 오전 11시로 거사 일정을 정하고, 기장면사무소에 근무하는 최창용(崔昌鎔)을 통해 기장면사무소의 등사판과 등사 원지를 빌려 옛 기장 장관청(將官廳) 등에서 독립 선언서를 등사하였다. 4월 5일 주동자들은 ‘양심발원(良心發源) 인도적 자유 민족’과 ‘조선 독립 만세, 조선독립단’이라고 대서특필한 큰 깃발을 들고 기장 장터에 도착해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며 기장면 3·1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때 오기원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1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 받았다. 1919년 6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기각되어 대구감옥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오기원은 출옥 후 권철암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동삼성(東三省)에서 초등학교 교장을 지냈다고 한다. 3년 뒤 고향의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기장으로 왔다가 고문으로 다친 부분이 재발하여 만주로 가지 못하고 1940년 11월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2년에 건국 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