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2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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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澤奎 |
영어음역 | Yi Taekgyu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택규(李澤奎)[1899~?]는 1899년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5일 기장면 3·1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3·1 운동의 소식과 동래 장터의 3·1 운동 소식이 기장에 전해질 무렵 당시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 2학년생이었던 김수룡(金壽龍)이 내려와 이택규를 비롯한 김도엽(金度燁)·권철암(權鐵巖)·구수암(具壽巖)·최기복(催基福)·박공표(朴孔杓)·오기원(吳基元) 등 기장 지역 청년들에게 독립 선언서를 전달하면서 기장면 3·1 운동이 계획되었다. 주동자들은 기장 장날인 4월 5일 오전 11시로 거사 일정을 정하고, 기장면사무소에 근무하는 최창용(崔昌鎔)을 통해 기장면사무소의 등사판과 등사 원지를 빌려 옛 기장 장관청(將官廳) 등에서 독립 선언서를 등사하였다.
기장 장날인 4월 5일이 되자 주동자들은 준비한 큰 깃발과 독립 선언서를 들고 기장 장터로 나아갔다. 오전 11시 주도 인물들은 ‘양심발원(良心發源) 인도적 자유 민족’과 ‘조선 독립 만세, 조선독립단’이라고 대서특필한 큰 깃발을 시장 한복판에 세우고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였다. 미리 배치한 오기원과 장봉기(張琫起), 최학림 등의 호응을 얻어 시위 군중들과 함께 기장면 일대를 일주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택규는 시위 주동자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1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여 6월 11일 징역 1년 6월형이 선고되어 대구감옥소에서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