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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797
한자 權銀海
영어음역 Gwon Eunhae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차성로299번길 18[동부리 194]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송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출생 시기/일시 1903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 기장면 3·1 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1년 9월 - 기장여자청년회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22년 5월 - 양산 출신의 이상복과 결혼
활동 시기/일시 1922년 - 양산부인회 및 야학 설립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근우회 양산지회 설립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12월 - 부산부녀동맹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47년 - 부산여성민주동맹 위원장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47년 - 미소공동위원회 지지 활동으로 체포되어 4개월 동안 수감
활동 시기/일시 1948년 8월 - 남조선 인민 대표자 대회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48년 8월 - 양덕요양소 부소장으로 발령
활동 시기/일시 1950년 - 인민군과 남하
활동 시기/일시 1955년 -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 받음
활동 시기/일시 1967년 - 석방
몰년 시기/일시 1994년 7월 17일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출생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194지도보기
학교|수학지 명정의숙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활동지 기장여자청년회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320지도보기
활동지 근우회 양산지회 - 경상남도 양산군
활동지 양산농민조합 - 경상남도 양산군
활동지 조선혁명자구원회 - 부산광역시
활동지 부산여성민주동맹 - 부산광역시
활동지 남조선 인민 대표자 대회 - 황해도 해주시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회 운동가.

[가계]

아버지는 권상중(權商重)이고, 어머니는 강처일이다. 권상중은 기장의 첫 사립 학교인 보명학교와 명정의숙을 설립하였다. 할아버지는 권인후이다. 권인후는 기장 지역에서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던 현감을 쫓아내었다. 남편 이상복은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유학한 엘리트로, 안희제(安熙濟)백산상회(白山商會)에서 서기로 일하다가 1931년 3·1 운동 때 일본 경찰에게 맞아서 생긴 늑막염이 재발하여 사망하였다. 공산주의 운동을 한 이수형은 아들이고, 권동수(權東洙)는 친정 조카이며, 독립운동가 권복해(權福海)는 친동생이다. 기장을 대표하는 민족 운동가 김약수(金若水)는 외오촌 당숙이고, 사회주의자 박용선(朴容善)은 육촌 동생이며, 김도엽(金度燁)·김규엽 형제는 사돈이다.

[활동 사항]

권은해(權銀海)[1903~1994]는 1903년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194번지에서 1남 2녀 가운데 맏딸로 태어났다. 민족의식이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강렬하게 이어지는 가정 환경에서 성장하여 어려서부터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항일 민족의식을 명확하게 갖게 된 시기는 아버지 권상중이 설립한 명정의숙에 다니던 때였다. 명정의숙은 여학교였으며, 남학교인 보명학교와 한 건물에 있었다. 인척 관계인 김두봉(金枓奉)·박용선·김도엽 등이 보명학교에 다녔다.

이런 권은해가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1919년 기장의 3·1 운동에 참여한 일을 계기로 7월에 동창생, 동생 등과 더불어 고향을 떠나 서울로 공부하러 갔다. 하지만 여의치 않아 별 성과 없이 고향에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와 구수암(具壽巖)의 장례식을 사회장으로 치르는 일을 주도하였다. 구수암은 3·1 운동으로 일본 경찰에게 잡혀 받은 고문 때문에 병보석으로 출옥한 직후 사망한 기장 사람이다. 구수암의 장례식을 계기로 결단력과 추진력 있는 활동가로 명성을 얻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민족 운동과 여성 운동에 돌입하였다. 먼저 1921년 9월 기장여자청년회 설립에 앞장섰다. 기장여자청년회는 기장 3·1 운동에 참여하였던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단체로, 여자 야학을 운영하여 여성에게 교육을 보급하고 계몽 활동을 펼쳤다. 권은해는 야학의 설립과 활동을 주도하였으며, 명정의숙 출신으로 권은해와 함께 서울로 상경하였던 여성들이 힘을 보탰다. 1922년 5월 양산 출신의 이상복과 결혼하여 활동 무대를 시댁이 있는 양산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후 양산청년회의 후원을 받으며 양산부인회를 설립하고 야학을 운영하는 일에 앞장섰다. 1929년 6월 근우회 양산지회의 설립을 주도하였고, 근우회가 해소될 즈음에는 1931년 4월 초에 설립된 양산농민조합의 부녀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무렵 조선 공산당 재건 조직에 가입하였다. 1931년 남편이 사망하자 다시 기장으로 돌아왔다. 마침 조카인 권동수가 반제동맹당 사건으로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돌보는 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곧바로 부산으로 가서 권동수의 옥바라지를 시작하였다. 이 때 권동수의 부탁으로, 함께 수감되어 있던 이승엽과 김형윤 등에게도 매일 사식을 넣어 주었다. 이들이 다른 형무소로 이감된 후 기장으로 돌아와 생계를 꾸리는 한편 지역 운동 인사들과 교제하면서 지냈다.

해방이 되자 박용선의 권유에 따라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으로 이주하여 조선혁명자구원회[1946년 1월 반일운동자후원회로 개칭]에서 일하였다. 조선혁명자구원회는 일제 말기에 탄압을 피해 잠복하거나 잠복 결과 활동력을 잃고 있는 옛 항일 운동가들을 규합하고, 동시에 조선 공산당 경상남도당의 연락 거점 역할을 하는 기관이었다. 조선 공산당 경상남도당 서기국에 속하여 활동하는 가운데, 1945년 12월 17일 부산부녀동맹의 결성식에서 개회사를 하는 등으로 부산부녀동맹을 지원하였다.

1947년 2월 이후 남조선노동당 경상남도당 산하 부산여성민주동맹[경상남도 부녀총동맹의 후신]의 위원장을 맡아, 부산에서 개최된 삼일절 기념 대회, 5월 1일의 미소공동위원회 재개 축하 메이데이 기념 대회, 7월 27일의 미소공동위원회 경축 민주 임시 정부 수립 촉진 시민대회 등 남조선노동당의 대중 집회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1947년 8월에는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바라는 뜻에서 부산여성민주동맹의 맹원들과 함께 선물을 만들어 덕수궁에서 열리고 있던 미소공동위원회에 직접 찾아가 「테러 방지 건의안」과 함께 전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1947년 겨울 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 동안 고초를 겪다가 풀려났다. 5·10 단독 선거를 앞두고 석방되었는데, 단독 선거를 반대하는 단체는 미군정의 강력한 탄압을 받았다. 이에 공개적인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기장으로 귀향하였다.

1948년 8월 21일부터 26일까지 황해도 해주시에서 개최된 남조선 인민 대표자 회의에 양산군의 대표로 참가하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대의원이 된 이들은 간부 학교에서 일정한 교육을 받고 직장에 배치되었으며, 권은해는 평안남도 양덕요양소의 부소장으로 발령을 받아 생활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서울을 거쳐 진주에서 딸을 만났다. 개전 직후 아들이 경찰에 끌려가 학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후 북한군이 후퇴할 때 빨치산 투쟁을 자원하였지만 노령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이후 피신 생활을 하다가 1955년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 받았다. 감형으로 1967년 석방된 후 기장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94년 7월 17일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서부리 86-5번지에서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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