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3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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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東洙 |
영어음역 | Gwon Dongsu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차성로299번길[동부리 194]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송희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회 운동가.
[가계]
증조 할아버지는 기장 지역에서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던 현감을 쫓아낸 권인후이고, 할아버지는 명정의숙과 보명학교를 세우고 기장의 광복회 운동을 이끌었던 권상중(權商重)이다. 독립운동가 권은해(權銀海)와 권복해(權福海)가 고모이고, 권은해의 아들 이수형이 사촌이다. 기장을 대표하는 민족 운동가 김약수(金若水)는 외종조부이고, 사회주의자 박용선(朴容善)은 칠촌 재당숙이며, 김도엽(金度燁)·김규엽 형제는 외삼촌이다.
[활동 사항]
권동수(權東洙)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증조 할아버지에서 할아버지로 민족의식이 강렬하게 이어지는 가정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또한 기장은 1919년 3·1 운동이 격렬하게 벌어졌고, 1920년대 초반에 청년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지역이다. 이러한 계기들을 통해 권동수는 일찍부터 사회 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다.
권동수는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 재학 시절 동래소년동맹에서 활동하였으며, 이때 비밀 결사인 적기회의 조직선전부 일을 담당하였다. 기관지인 『적색 뉴스』를 인쇄하여 회원들에게 배부하는 일이었다. 적기회는 1931년 9월 단체의 명칭을 동래반제전위동맹으로 변경하였다.
동래반제전위동맹은 10월에 조선 공산당 재건 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이승엽(李承燁)·안영달(安永達)의 부탁을 받고, 역시 이승엽과 함께 조선 공산당 재건 운동을 하고 있던 김형선(金炯善)의 동생 김형윤(金炯潤) 등과 함께 부산헌병대, 조선방직회사·부산고무공장·환대고무공장·일영고무공장 등 부산진 공업 지대에 수차례에 걸쳐 반전(反戰) 격문을 살포하였다. 이것이 소위 10월 혁명 삐라 사건이다. 이 사건이 11월에 경찰에 발각되면서 권동수는 김형윤과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이때 남편의 사망으로 기장으로 돌아와 있던 고모 권은해가 권동수의 옥바라지를 하였다. 권동수는 출옥 후 1934년 봄 공장연구회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부산적색노동조합 설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다시 10월경에 검거되어 곤욕을 치렀다.
해방 후 권동수는 1945년 12월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의 결성 대회에서 원재희·조재수 등과 함께 경상남도의 대의원으로 참가하였다. 1946년 11월 남로당이 결성되자 권동수와 권은해는 남로당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이 때문에 1945년~1946년 이승만(李承晩)의 백색 테러가 기승을 부릴 때 이들은 서북청년단 등의 백색 테러에서 주요 대상이 되었다. 권동수 본가의 가재도구는 물론 지붕의 기왓장까지 부술 정도이다. 결국 1948년 경찰의 탄압을 피해 피신한 상태에서 실종되었고 이후 생사가 묘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