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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808
한자 靑年運動
영어의미역 Busan Youth Movement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승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 청년 단체들의 민족 운동.

[부산청년회]

부산 지역 청년 운동은 3·1 운동을 전후하여 부산진, 고관(古館), 초량, 영주동, 영도, 부민동, 아미동 등지에서 활동하던 청년회, 또는 구락부 형태의 7개 청년 단체들이 1920년 11월 말 ‘부산청년회’를 결성하면서 시작되었다. 부산청년회는 1920년 12월 청년 운동의 전국적 조직체로서 창립된 조선청년회연합회에 참가할 정도로 일찍부터 민족 운동에 적극적이었다.

1921년 7월 부산 청년 회관을 기공하면서 일반인들을 위한 교양 강좌를 개설하고, 노동 단체를 조직하여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에 앞장섰다. 그 결과 1921년 9월 부산 부두 총파업이 발생했을 때 부산청년회는 그 멤버인 김종범(金鍾範)을 매개로 파업 투쟁 선언서 3,000매를 인쇄·배포하는 등 파업 초기부터 적극 지원하였다.

또 물산 장려 운동과 민립 대학 설립 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밖에 도항증(渡航證) 발급을 두고 부산경찰서와 결탁하여 일본으로 건너가려는 노동자들을 갈취한 박춘금의 친일 단체 상애회(相愛會)에 맞서 도항증(渡航證) 철폐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고, 1925년에는 친일 사이비 종교 단체였던 보천교 박멸 운동을 통해 부산 지역민들의 계몽에도 앞장섰다. 특히, 도항증 철폐 운동은 일본으로 통하는 관문이라는 지역의 특성상 부산 지역 청년 운동에서만 존재했던 특징적 실천 운동이었다.

[동래청년회]

한편 동래에서도 1920년 1월 무렵 ‘동래청년구락부’가 결성되었다. 동래청년구락부는 김해 시민대회에 참가하여 지역민들과의 교류를 넓혔으며, 매년 정월 동래에서 개최된 동래 줄다리기를 주관함으로써 지역의 전통 민속놀이 보존에 큰 역할을 하였다. 또 동래 주민들의 숙원 사업인 대운동장 확보를 위해 온천장 일대를 상대로 운동장 부지 확보 교섭을 벌인 것을 비롯해, 주민들의 교육·산업·위생에 관한 문화 보급에 앞장섰다. 특히 일본인들의 출입이 잦은 온천장에서 동래권번(東萊券番)의 풍기 문란 단속과 미풍양속 개량에 노력하였다. 이상의 활동을 해온 동래청년구락부는 1922년 그 명칭을 ‘동래청년회’로 바꿨다.

[변천]

부산과 동래 지역 청년 운동은 1925년을 전후하여 사회주의 성향의 사상 단체들이 출현하면서 무산 계급 중심의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 부산청년회동래청년회는 1925년 연말 각각 혁신 총회를 통해 청년 운동의 조직적 역량을 강화하고 부산부 청년연맹, 부산청년연맹, 동래청년연맹과 같은 지역 단위의 청년 운동 연맹체를 결성하였다. 이후 1927년 반제민족통일전선체인 신간회의 결성과 맞물려 기존의 청년 연맹체들은 20대들이 주축이 된 소장층을 중심으로 한 부산청년동맹과 동래청년동맹으로 재편된다. 이들 두 조직은 일제 강점기 3대 파업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1930년 조선 방직 직공 파업을 적극 지원하는 등 1920년대 후반 1930년대 초 신간회 부산지회 및 동래지회와 더불어 항일 운동의 중심축으로서 활동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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