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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청년연맹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804
한자 東萊靑年聯盟
영어의미역 Dongrae Cheongnyeon Federati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청년 단체
설립 시기/일시 1925년 11월 22일연표보기 - 동래청년연맹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28년 2월 26일연표보기 - 동래청년연맹 해체
최초 설립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주소 변경 이력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462
현 소재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462-2

[정의]

1920년대 부산 동래 지역에 있었던 청년 운동 연합체.

[설립 목적]

동래청년연맹은 1920년대 초반 문화 운동에 한정된 청년 운동을 혁신하고 동래군 내 각 청년 단체의 대동단결된 조직을 결성하여 운동 전선의 통일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리고 타협적 민족 운동을 배격하고 혁명적 민족 운동을 전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변천]

1920년대 전반 사회주의 청년 운동의 전국적 확산으로 청년 단체의 새로운 지도 기관이 요구되면서 1924년 조선청년총동맹이 결성되었고, 이에 따라 각 지역에 상호연계 없이 산재되어 있던 청년 운동 조직을 모아 공동 전선을 형성하고 통일적 활동을 꾀하고자 전국적으로 군·부 청년연맹이 조직되었다.

동래 지역에서도 1925년 11월 1일 동래군 청년 단체 연합 육상 경기 대회를 개최한 후 서면청년회, 구포청년회, 남면노농청년회, 감만청년회, 동래여자청년회, 동래청년회의 발기로 동래청년연맹을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11월 22일 동래 기영 회관에서 동래군 소재 16개 청년 단체 대의원 24명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의 화요회와 북풍회 외 6개 단체의 축문과 김해청년연맹 외 9개 단체의 축전 낭독 후 동래청년연맹을 창립하였다.

동래청년연맹 창립에 참가한 청년 단체는 기장정진청년회, 서면청년회, 수영노동청년회, 기장여자청년회, 철마청년회, 수영여자청년회, 송정청년회, 구포청년회, 구포여자청년회, 하단청년회, 일광청년회, 이천청년회, 서면용호청년회, 감만청년회, 동래여자청년회, 동래청년회 등이었다. 이날 집행 위원 15명과 검사 위원 60여 명을 선정하고 이튿날 오태근의 사회로 집행 위원회를 개최하여 서무부 박문희·김철규, 교양부 김수선·오태근, 조사부 김영룡, 조직부 박문희 등 각 부서의 상무위원들을 선정하여 조직 정비를 완료하였다.

동래청년연맹은 청년 운동의 통일을 위해 경상남도청년연맹 결성에 노력하였다. 1927년 10월 10일 제8회 집행 위원회를 동래 청년 회관에서 개최하고 이 당시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던 방향 전환론에 발맞추어 청년연맹을 청년동맹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동래청년회가 1928년 1월 26일 가장 먼저 해산하자 산하 단체들도 해산함으로써 동래청년연맹은 1928년 2월 26일 해체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동래청년연맹은 혁명적 민족 운동의 전개를 목적으로 하고 청년 운동의 통일을 위해 경상남도청년연맹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석하였다. 그리고 청년 운동, 여성 운동, 노동 운동 등의 활성화를 위해 운동의 중심이 되는 청년 대중의 교양과 훈련을 담당할 교양 기관을 설치하고 독서회, 강연회, 연극 개최, 노동 야학 설치에 노력하였다.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사회 운동을 저해하는 단체를 배격하고 기근선상의 빈민의 생활을 조사하여 구제에 노력하고 형평 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신간회 결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동래청년연맹은 무산 계급 청년 운동의 방침에 따라 청년층에게 계급적 자각을 일깨우면서 반봉건·반종교를 주창하고 대중의 일상 활동을 옹호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의의와 평가]

동래청년연맹의 결성으로 동래 지역의 개별 청년 단체를 통괄하여 청년 운동의 혁신과 통일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동래청년연맹은 동래 지역 청년 단체의 개별 활동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중앙 청년 단체와 관련된 문제 및 청년회 전반에 관련된 사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동래청년연맹 결성 이후 동래 지역 청년 단체는 이전 시기에 비해 청년들의 역할과 계급적 자각을 보다 깊이 인식한 속에서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으나 아직 청년 운동에서 중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던 민족주의 청년 단체와 종교계 청년 단체를 견인하기 위한 구체적 방책과 협력에 필요한 원칙도 세우지 못해 전체 청년 운동을 이끌기에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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