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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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立運動 |
영어의미역 | Independence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경숙·박철규 |
[정의]
일제의 식민 지배를 극복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사회 경제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전개된 부산 지역의 실천 활동.
[부산 지역 독립운동의 사회 경제적 조건]
부산은 1876년 조일 수호 조규[병자 수호 조약]의 체결로 우리나라 최초로 개항이 된 도시이다. 일본 전관 거류지의 설치와 항구라는 지리적 조건은 부산으로 하여금 일본의 조선 침략과 대륙 침략의 교두보 역할 및 일본 경제 수탈의 관문 역할을 강제하였다. 조선을 비롯하여 만주·중국까지 자신들의 세력권 내에 포함시키고자 했던 일제의 대아시아 정책에 있어, 부산은 일본 본국과 대륙을 연결하는 거점이자 관문이었기 때문에 지정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이었다. 게다가 개항 이전부터 왜관 무역이 이루어진데다 이를 기반으로 조선에서 첫 번째 개항지가 되어 본격적인 식민 도시로 육성되었기 때문에 부산에는 일본인의 이주가 많았을 뿐 아니라 각종 사업체·사회단체 등이 집중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의 긴장 관계 또한 타 지역에 비해 각별했고, 일본인에 의한 사회 경제적인 수탈과 횡포 역시 어느 곳보다 극심하였다. 이에 부산에서는 주권 상실 이전부터 일본에 대한 저항이 나타나고 있었다. 개항 이후 부산 지역민의 항쟁으로는 일본의 무력시위와 관련된 일본 군함 봉상함 사건[1876년 4월]과 경제 수탈과 관련된 부산해관 수세 사건[1878년 9월], 쌀 판매 거절 사건[1884년 10월], 선창가 투쟁 사건[1886년 6월], 동래 민중 항쟁[1883년 5월] 등이 있다. 이러한 부산 민중의 저항은 일제 강점기에도 지속되었다.
한편 부산은 일본으로부터의 인적·물적 교류뿐만 아니라 유학생 등을 통한 신사상의 수입도 손쉬웠기 때문에 이른 시기부터 일제에 대항하고자 하는 여러 항일 단체들이 결성되어 다방면으로 활동하였다.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 일어난 항일 운동의 흐름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910년대의 비밀 결사 운동]
1910년대 부산 지역의 민족주의 운동은 비밀 결사 운동과 3·1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10년대 비밀 결사 운동은 주체로 볼 때 학생층과 민족 부르주아 계층의 결사운동으로 진행되었다. 학생 비밀 결사로는 1910년 부산상업학교 학생 변상태(卞相泰), 최기택, 성학년[또는 성학영] 등 6명이 결성한 대붕회(大鵬會)와 1915년 부산상업학교 재학생 오택(吳澤), 박재혁(朴載赫), 박흥규, 김인태 등 10여 명이 주동이 되어 조직한 비밀 결사 구세단이 있었다.
부산 지역 부르주아 계층과 관련한 대표적인 비밀 결사는 대동청년단·조선국권회복단 등이 있다. 대동청년단은 1909년 10월경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의 계몽적 지식인 80여 명이 결성하였다. 대동청년단을 결성할 당시 이들은 17~30세의 청년으로 대개 학생이었으나, 이후 부르주아 민족 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부산 지역의 3·1 운동]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 만세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독립 선언서가 전국 각지에 배포되었고, 고종(高宗)의 국장에 참례했던 많은 사람들이 귀향하여 일제에 대한 항쟁과 시위 사실을 그들의 고장에 알렸기 때문이었다. 3월 2일과 3일 경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을 통하여 독립 선언서가 부산과 마산에 비밀리에 배부되었고, 서울에서 학생 대표가 내려와 경성학생단의 이름으로 부산상업학교와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대표에게 독립 선언서를 전달하였다.
부산 지역의 3·1 운동은 부산진일신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일대에서 시작되어[3월 11일]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봉기[3월 13일], 범어사 명정학교 학생 의거[3월 16일],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3월 29일], 기장면 3·1 운동[4월 5일], 좌천 장터 3·1 운동[4월 8일], 명지면 3·1 운동[4월 11일], 가덕도 3·1 운동[4월 11일] 등 부산 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참여 계층도 학생, 교사, 농민, 어민 등 다양하였다.
3·1 운동은 이전의 동지적 유대를 바탕으로 일부 인사들에 국한된 비밀 결사 형식의 운동에서 벗어나, 학생층과 민족 자본가, 노동자, 상인 등 광범위한 계층의 참여하에서 이루어진 전 민족적 의거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20년대의 사회운동과 신간회]
1. 부르주아지 문화 운동의 전개
3·1 운동 이후 일제가 종래의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지배 체제를 전환하자 이를 역으로 이용하여 민족의 독립 의식과 민족 역량을 강화시켜 독립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나타났다. 그 동안 억눌려 있던 노동자·농민·여성·청년 등 각 계급 계층의 부문 운동이 조직적으로 정비되고 이에 따른 다양한 대중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세계 개조, 지방 개조, 신문화 창조’와 같은 실력 양성론을 내세웠는데 이것이 곧 문화 운동이었으며, 대표적인 분출구가 바로 청년회였다.
이 시기 의열단원 박재혁(朴載赫)의 부산경찰서 폭파 사건[1920년 9월 14일]과 같은 의열 투쟁이 전개되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민족 부르주아지의 문화 운동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부산 지역 민족 부르주아 층의 ‘문화 운동’을 배태시킨 단체는 1919년 11월과 12월에 각각 결성된 기미육영회와 부산예월회였다. 두 단체는 부산을 비롯한 인근 지역 민족 부르주아 40여 명이 관여하여 결성한 조직으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백산무역주식회사의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윤병호(尹炳浩), 구포은행 지배인과 경남은행장을 지낸 문상우(文尙宇), 동래은행 지배인인 김병규(金秉圭) 등이었다. 이들은 지역 청년 중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학생을 외국에 유학 보내는 등 지방의 인재 양성에 노력하고 있었다.
또 전국 각지에서 청년 단체가 설립되어 문화 운동의 중심을 이루었다. 부산에서도 1920년 전후 부산진, 고관, 초량, 목도, 영주동, 부민동, 곡정[현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 등지에서 활동하던 7개 청년 단체가 11월 ‘부산청년회’를 결성하였다. 한편 같은 시기 동래에서도 ‘동래청년구락부’가 결성되었으며, 1922년 그 명칭을 ‘동래청년회’로 바꾸고 지역 사회에서 폭넓은 활동을 벌였다. 이들 청년회는 노동·영어·실업 보습 야학 운영, 춘추 시민 대운동회, 노동자 도일(渡日) 저지 철폐 운동, 주택 개선 운동, 물산 장려 운동 등의 활동을 하였다.
2.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과 신간회 활동
1920년대에 들어서는 3·1 운동의 실패로 지도 이념이 결핍된 상황에서, 이미 성장한 대중 운동을 이끌어 갈만한 지도 노선을 확립하기 위해 다양한 이념과 방법론이 수용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과 단체의 설립이었다. 사회주의 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따라 부산에서도 1925년을 전후하여 사회주의 운동이 성장하였고, 혁신 청년회 활동이 나타났다. 대표적인 단체는 김희봉과 차학순을 중심으로 한 부산 ‘제4계급’[1925년 11월], 박문희를 중심으로 한 동래혁파회[1925년 11월] 등이었다. 또 계급 해방을 표방한 소장층의 혁신 청년회로 부산청년연맹[1925년 11월]과 동래청년연맹[1925년 11월]이 출현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는 조직의 역량 강화를 위해 부산청년동맹[1927년 12월 14일]과 동래청년동맹[1928년 2월 26일] 등의 협의체 조직으로 재편되었다. 부산청년동맹과 동래청년동맹은 회원의 연령 제한[17~30세 또는 18~25세]을 실시하여 독립운동에서 세대교체를 이룰 수 있었다. 한편 좌우 합작 운동의 결과 1927년 2월 15일 서울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항일 통일 전선체인 신간회를 결성하자 부산에서도 신간회 부산지회[1927년 7월 30일]와 신간회 동래지회[1928년 4월 21일]가 결성되었다.
신간회 부산지회와 동래지회는 회원과 대중을 상대로 강연회를 개최하여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협동조합을 설립하고, 도항(渡航) 노동자를 위한 ‘도일 노동자의 자유 획득 동맹’ 결성을 추진하는 등 다양한 사회 운동을 전개하여, 노동자의 권리 의식과 항일 의식 고취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929년 봄을 기점으로 한 신간회 지도부의 변화와 함께 1929년 11월의 광주 학생 운동에 따른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면서 1930년 11월 부산에서 최초로 신간회 해소론이 제기되었고, 신간회는 1931년 5월에 해산되었다.
[근로 대중의 항일 운동]
1. 노동 운동의 조건
청년 운동의 활발한 전개와 함께, 그들 진보적 청년 지식인들의 지도로 사회 운동 중 노동 운동 부문 또한 타 지역보다 활발하였다. 부산 지역의 노동 운동은 직종별로 보면 공장 노동자의 압도적 다수가 종사하고 있던 방직 공업, 식료품 공업, 고무 공업, 인쇄 공업 등이 중심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 공업의 주력은 정미업, 방직업, 고무 공업이었다. 이들 업종은 대표적인 노동 집약적 공업으로 조선인 고용의 비중, 특히 여성 노동자의 비중이 높았으며 다른 업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임금 수준이 낮았다.
당시 거의 모든 방직 공장 노동자가 하루 11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형태는 정미 공업, 고무 공업 등 부산 공업의 주종을 이룬 노동 집약적 업종에서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이런 가운데 일제 강점기 물가 지수는 일관되게 임금 지수를 앞서고 있었다. 이는 실질 임금의 하락을 초래하는 것으로 노동자의 수탈이 더욱 심화되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부산의 경우 물가는 전국 평균보다 높고 임금은 전국 평균보다 낮은 경향을 띠고 있었다. 이는 다른 지역에 비해 부산 지역에서 노동자의 수탈이 더욱 강력하였음을 의미한다.
부산 지역의 노동 운동은 한국 노동 운동사에 획을 그은 1921년 운수 부문 노동자의 총파업[부산 부두 총파업], 1922년·1923년·1930년 등 수차례에 걸쳐 전개된 조선방직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 1925년 말의 부산 인쇄 직공 총파업[1925년 11월] 등에서 보듯이 공장 노동자를 중심으로 본격화되었다.
2, 운수 부문 노동자 총파업과 인쇄 직공 조합 파업
운수 부문 노동자의 총파업은 1921년 9월에 발생하였다. 부산은 항구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곡물 및 상품 유통의 집산지로서 선박을 통한 운송 부문이 발달하였다. 개항과 더불어 부산은 한반도의 막대한 미곡과 값싼 원료들이 빠져 나가고 일제의 공산품이 들어오는 대륙 무역항의 창구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 결과 부산항의 기능은 확대되었으며, 부두를 중심으로 한 무역 회사와 운송 노동자 또한 증가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 운수업자들은 1920년~1921년 전후의 경제 공황에서 입은 손실을 노동자에게 전가하기 위하여 부두 노동자의 임금을 수차례에 걸쳐 대폭 인하하였다. 이에 1921년 9월 17일 택산상회에 고용된 부두 노동자들이 4~5할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서 운수 노동자의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총파업 항쟁은 부산 항만 운송 전체의 정지 상태를 가져왔다. 이 총파업은 고용주들의 임금 인하 책동을 저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결국 임금을 10~15% 인상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운수 부문 노동자의 총파업은 한 도시 동일 부문의 전체 노동자들이 전체 고용주들을 상대로 전개한 조선 초유의 대규모 항쟁으로, 이를 계기로 1922년 1월에는 부산 최초의 노동 단체로서 부산노동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이 영향 하에서 공장 근로자들이 크게 고무되어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0년대에 전국적으로 전개된 노동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인쇄 직공 조합 파업 항쟁은 1925년 11월에 발생하였다. 부산인쇄직공조합이 1925년 11월 22일 부산 지역 인쇄 업종 자본가 단체인 인쇄동업조합에 맞서 9시간 노동제, 최저 임금, 재해 보상, 해고 수당, 조합 활동 보장 등의 요구 조건을 제시하면서 단행한 파업이었다. 조합원 200여 명이 단행한 이 동맹 파업은 12월 중순에 노동자들의 복직과 자본가들의 부분적 파업 요구 수용이라는 타협으로 막을 내렸다.
이 파업 투쟁은 당시 민족 자본가들이 주도하던 ‘문화 운동=실력 양성 운동’이라는 틀 속에서 전개된 것이었다. 그 배경에는 문화 운동이 고조되면서 노동자들의 생활적 요구와 결합, 그들의 민족의식과 권리 의식이 크게 앙양되었던 점이 작용하였다. 이 파업 투쟁은 전례 없을 정도로 대규모였고, 최초로 지역 내 한 산업 부문 노동자 전체가 파업에 참여하는 총파업의 형식으로 전개되었으며, 전국의 직업별 노동조합의 지원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노동 운동이 한 단계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3. 부산조선방직주식회사 총파업 및 기타
1930년 1월에 발생한 부산조선방직주식회사 총파업은 조선방직주식회사의 노동자 2,000여 명이 임금 인상, 8시간 노동제 실시, 기숙사의 식사 개선, 취업 중 부상자에 대한 위자료 지불, 직공에 대한 벌금제 철폐 등을 내걸고 단행한 파업이었다. 파업이 일어나자 회사 측은 여성 근로자들을 기숙사에 감금하는 한편 경찰과 합심하여 노동자들을 압박했고, 2월 20일 파업 노동자들의 요구가 크게 반영되지 못한 타협안에 따라 파업은 끝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이 파업은 1929년 세계 대공황 이후 공황 경기 속에서 일어난 국내 최대의 파업으로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조선방직회사 노동자 파업은 민족 차별과 계급 착취, 인권 유린이라는 식민지 조선의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과 일제의 악랄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으며, 특히 투쟁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의식이 고양되어 일제 강점기 여성 노동자들의 대표적인 투쟁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후에도 부산에서는 1930년 9월 4일 환태고무 공장 직공들의 파업, 1933년 10월~11월 6개 고무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 1935년 9월 삼화고무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 등 근로 조건을 개선하고 임금 인하를 반대하며 민족 차별에 항거하는 투쟁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조선총독부가 「군수 공업 동원법」[1937년 9월 14일], 「국가 총동원법」[1938년 5월], 노임 공정제[1939년 1월] 실시, 강제 징용 징발 등을 통해 노동 운동을 탄압함으로써 노동 운동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학생 운동]
1. 반제 동맹 사건과 부산 항일 학생 운동
학생들의 독립운동은 3·1 운동에서 드러났듯이 식민지 시대 민족 운동의 한 축으로 전개되었다. 1920년대 들어 전국적으로 독서회 형식을 통한 소모임이 확산되면서 학생층의 반일 의식 또한 한층 강화되었다. 이러한 조직은 시간이 지나면서 초기의 계몽주의적인 성격을 극복하고, 맹휴에 앞서 투쟁 지도부가 구성되는 등 지도부의 사회주의 이념 수용에 따른 의식적인 지도 아래 동맹 휴학이 전개되는 경향을 나타냈다. 이러한 특징은 동래고등학교의 1925년 대(大)맹휴, 흑조회[또는 혁조회]결성, 1926년 장산 촛불 사건, 1927년 동맹 휴학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일제는 광주 학생 운동을 시작으로 전국적 확산 조짐을 보이던 학생 운동을 탄압하는 한편, 만주 사변을 앞두고 황민화 정책을 학교 일선에서 적극적으로 강화하였다. 그 결과 학생 운동도 학교 내에서 더욱 의식화되고 소수 정예화되는 비밀 결사 운동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나온 것이 동래고등학교의 반제 동맹 사건이다. 반제 동맹 조직은 1931년 12월 동래고등학교 4학년 학생[10회] 14명이 반제국주의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이 발각되어 검거되면서 밝혀졌다.
일제는 1937년 7월 중일 전쟁을 일으킨 후 침략 전쟁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 각종의 동원령을 내렸다. 대표적인 것이 1938년의 국가 동원령과 육군 특별 지원병 제도, 1941년의 사상범 예방 구금령, 1943년의 학도병과 해군 특별 지원병 제도였다. 나아가 1944년에는 전국적인 강제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이와 같은 전시 체제 하에서 학생의 군사 교련 훈련도 강화했는데, 1940년 11월 23일 발생한 부산 항일 학생 운동[일명 노다이 사건]은 이와 같은 학생들에 대한 군사 집체 훈련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1940년 11월 23일 제2회 경남 학도 전력 증강 국방 대회가 개최되자 이틀 동안의 야영 훈련을 마친 동군과 서군이 11월 23일 부산 공설 운동장에서 개최된 전력 증강 국방 대회에 참가하였다. 대회 과정에서 일본인 심판들은 일본인 학교인 부산중학교에게 우승을 안겨주기 위하여 부당한 판정을 자행하였고, 대회 총 책임자인 부산 병참 기지 사령관인 노다이[乃台兼治]는 한국인 학생의 항의를 묵살하였다.
우승기가 부산중학교에 돌아가게 되자 동래중학교[현 동래고등학교]와 부산상업학교[구 부산상업고등학교, 현 개성고등학교] 학생들의 불만이 폭발하였다. 이들은 공설 운동장에서 중앙동까지 가두시위를 벌이고, 부산 터널 인근에 있던 노다이 관사를 습격하였다. 이 사건으로 두 학교에서 21명이 퇴학을, 44명이 정학을, 10명이 견책을 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부산 학생 항일 운동은 일제의 전시 체제 하에서 전개된 최후의 대규모 학생 투쟁이었으나, 일제의 보도 관제로 말미암아 타 지방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2. 조선청년독립당 사건과 순국당 사건
1944년 8월 1일 동래중학 조선청년독립당 사건이 발생하였다. 조선청년독립당은 노다이 사건에 참가한 동래중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 학생 조직으로 1940년 겨울 당시 동래중학교 학생이었던 양중모, 김병현(金柄鉉), 남기명(南基明), 김일규(金一圭), 김진훈(金鎭焄) 등이 중심이 되어 독서회를 조직한 데서 시작되었다.
조선청년독립당 사건은 조선청년독립당원 7명이 양중모의 집에서 시기를 보아 지역민에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고, 일본군 탄약고를 폭파하여 내란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고, 이를 위해 먼저 군용 열차가 구포를 통과할 때 폭파하기로 계획한 사건이었다. 만약 거사가 실패할 때는 모두 일본군에 입대하여 연합군에 투항한 후 중국에서 다시 회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계획을 실천에 옮기려 할 쯤 순국당과 관련된 이관수(李觀洙)가 검거되면서 당원 9명이 1944년 8월 모두 검거되었으며, 예심 1년 만인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석방되었다.
한편 1944년 7월에는 순국당 사건이 발생하였다. 순국당은 동래중학 조선청년독립당 사건의 단서가 되었던 조직이었다. 1943년 봄부터 부산진초등학교 졸업생인 차병곤(車炳坤)과 동창생 박정오, 신정호(辛正浩) 등 3명이 윤독회를 통해 항일 의식을 고취하고, 그 과정에서 뜻을 같이 하는 동지를 규합하여 1944년 5월 순국당을 결성하였다. 순국당은 불과 두 달 여의 활동에 그쳤으나, 당시 17~18세 학생들의 항일 운동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대담함을 보였다. 이들은 일본군 항공병이 되어 연합군에 투항한 뒤 일본군과 싸우겠다는 의도로 항공 학교에 지원하거나, 총독 암살용 사제 권총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또 고이소 총독 암살, 일본군 군사 시설 파괴, 일본인 집단 거주지[현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과 남포동] 방화, 은행 습격, 미군 공습 시 산불 놓기 등을 행동 목표로 정하고, 행동 목표를 기입한 지면에 혈서로 연명하였다. 순국당 참여자들은 1944년 7월 31일 일제히 검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