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7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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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萊高普學生蜂起 |
영어의미역 | March 1st Movement at Dongrae-jangteo |
이칭/별칭 |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봉기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285번길 22[칠산동 360]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강대민 |
[정의]
1919년 3월 13일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동래 장터에서 벌인 만세 시위.
[역사적 배경]
1910년대 일제의 가혹한 무단 통치가 시작되고 전 세계적으로 민족 자결주의가 성행하자 조선에서도 이에 편승하여 종교계 지도자들에 의하여 독립 선언서가 제작되고 3월 1일 만세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부산·경상남도 지역에서도 3월 3일 독립 선언서가 배포되고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3월 중순부터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경과]
부산 지역에 3·1 운동의 열기가 전파되자 부산진일신여학교를 필두로 하여 만세 시위가 이어졌다. 당시 동래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인호(金仁浩), 엄진영(嚴進永), 김귀룡(金貴龍) 등은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만세 시위를 기획하였다. 3월 13일 동래 장터에서 1대와 2대로 나누어 ‘대한 독립 만세’ 등의 기치와 태극기를 휘날리며 ‘오왕독살(吾王毒殺)’이라고 쓴 수백 매의 전단지를 뿌리며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곧 기마경찰과 군인 등이 현장으로 출동하여 시위를 진압하기 시작하였고 대다수의 학생들은 검거되었다.
[결과]
이 사건으로 김인호·엄진영 등 24명이 검거되고, 배후로 지목된 곽상훈(郭尙勳) 역시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이들은 1919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최고 1년 6개월에서 4개월의 형량을 언도 받았다. 이후 구속된 학생들은 취조와 옥중 생활의 후유증으로 김성조(金聖祚)는 병사하였고, 다수의 학생들은 출옥 후에도 오랜 기간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의의와 평가]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봉기는 이후 이어진 부산 지역의 만세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범어사 3·1 운동,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 기장면 3·1 운동, 좌천 장터 3·1 운동 등이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봉기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