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6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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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郭尙勳 |
영어음역 | Gwak Sanghun |
이칭/별칭 | 삼연(三然)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285번길 22[칠산동 360]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하유식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
[가계]
호는 삼연(三然). 할아버지는 동래부 중군(中軍)을 지낸 무관이었다. 아버지는 구한말의 어지러운 현실에 좌절하여 시회(詩會)에 파묻혀 지냈다. 36세에 장혜경(張慧卿)과 결혼하였다.
[활동 사항]
곽상훈(郭尙勳)[1896~1980]은 1896년 10월 21일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360번지 현풍 곽씨(玄風郭氏) 무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동래보통학교와 동명학교에서 신학문을 접하였다. 이후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에서 공부하였고 1917년에 제1회로 졸업하였다. 이후 인천에서 미곡상을 운영하던 형 집에 머물면서 경성공업전문학교에 다녔다.
3·1 운동이 발발하자 인천상업학교 만세 운동을 지도한 후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인 부산 동래로 내려왔다. 먼저 동래고등보통학교의 스승인 수학 교사 이환(李環)을 찾아가서 독립 선언서를 전달하고 동래에서의 의거를 상의하였다. 곽상훈은 이환과 더불어 1919년 3월 13일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동래 장날 만세 운동을 지도하였다. 동래경찰서에 연행되었으나 주모자가 아니라고 항변하여 사흘 만에 풀려났다. 이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려다 체포되어 대구경찰서와 영등포경찰서에서 취조와 고문을 당하였으나 예심에서 풀려났다.
곽상훈은 동래 3·1 만세 운동 주도 이후 국내외를 오가며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신간회에 참여하였고 안동 오산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의열단 관련 문제로 대구경찰서에 체포되어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후 부산 토박이 독립운동가 최천택(崔天澤)의 도움을 받아 상하이로 가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일제 말에는 동래 기장에 은거해 있다가 해방 직전 예비 구속되었으며 대구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48년 제헌 국회 의원 총선거 때 한국민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5선의 국회 의원으로, 4대와 5대 국회에서는 국회 의장을 맡았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으로 검찰 차장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때는 의원 내각제 개헌에 참여하였다. 1955년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1956년 민주당 최고 위원이 되었다. 4·19 혁명 후 1960년 5월 17일부터 5월 21일까지 일시적으로 대통령 권한 대행을 수행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후 국회 의장직을 사퇴하고 곧 민주당을 탈당하였다. 이후 유신 체제에 참여하여 육영재단 이사장,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회장, 윤봉길기념사업회 회장, 통일주체국민회의 운영 위원장 등을 거쳤다. 전직 국회 의원들로 이루어진 대한민국 헌정회의 초대 회장을 지냈다. 1980년 1월 19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나의 초대 민의원 시절」[『한국 일보』, 1975]이 있다.
[묘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제2 유공자 묘역-9]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9년에 국민 훈장 무궁화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