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721 |
---|---|
한자 | 加德鎭義擧 |
영어의미역 | March 1st Movement at Gadeok-do |
분야 |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경숙 |
[정의]
1919년 4월 11일 부산 가덕도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
[역사적 배경]
만세 운동이 일어난 가덕도동 가덕도는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자그마한 섬이다. 예부터 국방의 요지로 이곳에는 가덕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외침을 방비하는 곳인 만큼 섬의 주민들의 자주성은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일제는 이곳 가덕진을 무단 점거하고 가덕진의 무기고를 불법으로 털어가는 한편, 같은 해 7월에는 주민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등 숱한 만행을 저질렀다. 1906년에는 진해 군항을 개설하면서 가덕도를 군항 요새지로 편입하고 주민들의 이권마저 강점함으로써 주민들의 생활권을 크게 위협하였다. 그 결과 자연적으로 가덕도 주민들은 항일 정신이 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과]
가덕도의 유지 양흥석(梁興錫)이 1919년 3월말 경 서울에서 내려오면서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왔다. 양흥석은 우선 최세권(崔世權)과 김동원(金東源)에게 독립 선언서와 함께 서울 3·1 운동의 양상을 전하였다. 이들 3명은 가덕도에서도 독립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의논하고, 이상운, 조용진(趙鏞晉) 등의 동지를 포섭, 거사 일자를 4월 11일로 확정하였다.
4월 11일 정오가 지나면서 섬의 주민들은 속속 태극기를 손에 들고 가덕도로 모여 들었다. 오후 3시 독립 선언서의 낭독에 이어서 주동자들의 선창으로 모두 일제히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400여 명의 시위 군중들은 대오를 지어 만세를 외치며 섬 안을 한 바퀴 휩쓸고 돌았다. 당시 마산헌병대 가덕진분견소에는 순사가 3명뿐이었으므로 주민들의 시위 진압에 나서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날 오후 늦게 시작된 시위는 일본 경찰의 제지가 없는 가운데 평화적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다음날인 4월 12일 진해에서 완전 무장한 헌병 10명이 긴급 출동하여 섬 안을 샅샅이 수색하여 만세 시위 주동자 10명을 체포하여 진해헌병대로 압송하였다.
[결과]
가덕도 만세 시위의 주동자들은 검거된 후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에서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가운데 최세권이 징역 1년, 최찬수(崔燦洙)가 징역 1년, 김동원이 징역 1년, 김실이(金實伊)가 징역 6월, 김남수(金南守)가 징역 6월, 조용진이 징역 6월, 서용수(徐用守)가 징역 6월, 하인출(河仁出)이 징역 6월의 실형을 언도받고 마산교도소에서 복역하였다.
[의의와 평가]
일본 군대의 요새지로 편입되어 생활에 위협을 받고 있던 주민들이 일제 침략에 항거하여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사실은 주민의 항일 의식을 보여주는 것인 만큼 그 의의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