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1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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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南守 |
영어음역 | Gim Namsu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동 가덕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서용태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가덕도(加德島)는 오래전부터 국방의 요지로, 일찍부터 군사 시설인 가덕진(加德鎭)과 천성 만호진(天城萬戶鎭)이 설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가덕도 주민들은 전통적으로 애국심과 민족의식이 강하였다. 더욱이 러일 전쟁이 일어난 1904년 7월에 일본 방비대는 가덕도의 토지와 가옥을 약탈하고 주민을 내쫓아 가덕도 주민의 생존권을 위협하였으며, 연말에는 가덕도를 불법으로 점령하여 가덕진의 무기고를 전부 약탈하였다. 러일 전쟁이 끝난 후인 1906년에 가덕도 일대를 진해에 있는 일제 군항의 요새지로 편입하여 가덕도 주민의 각종 이권을 손아귀에 넣었다. 그 결과 가덕도 주민들의 저항 의식은 어느 곳보다도 높았다.
[활동 사항]
김남수(金南守)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동 가덕도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11일 전개된 가덕진 의거[가덕진 3·1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시작된 3·1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부산·경상남도의 각 지역에서도 만세 운동이 잇따라 일어났다. 가덕도의 유지인 양흥석(楊興錫)은 서울에서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내려왔다.
양흥석은 독립 선언서를 마을 청년인 최세권(崔世權)과 김동원(金東源)에게 전하면서 가덕도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벌일 것을 모의하였다. 독립 선언서를 본 최세권과 김동원은 김남수·이상운(李相云)·조용진(趙鏞晋) 등의 가덕도 청년들과 상의하여 1919년 4월 11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이후 김남수 등은 가덕도 내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의 저항 의식을 높이는 활동을 하였다.
4월 11일 가덕도 주민들은 손에 태극기를 들고 속속 가덕진으로 모여들었고, 오후 3시경에는 약 500여 명[일제 군경의 기록에는 약 300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에 김남수 등의 청년들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후, 이들의 선창으로 군중들이 일제히 조선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어서 시위에 참여한 군중들은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가덕도 내 마을을 돌면서 만세 시위를 벌였다.
당시 가덕도주재소에는 경찰 3명이 있었으나 군중들의 위세에 눌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할 뿐이었다. 이날의 독립 만세 시위는 평화적으로 끝났다. 가덕진 의거는 비록 규모나 양상이 다른 지역의 만세 시위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작았지만 일제의 침략과 식민 지배에 항거하는 의지만큼은 작지 않았다.
가덕도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의 소식은 곧바로 일제 당국에 알려졌다. 다음날인 4월 12일 무장한 일본 헌병들이 진해에서 들어와 섬을 샅샅이 뒤져 만세 시위의 주동 인물을 검거하였다. 이때 검거된 주동 인물 가운데 최세권·김동원·최찬수(崔燦洙)·김남수·하인출(河仁出)·김실이(金實伊) 등은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각 6개월에서 1년형을 선도 받아 마산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김남수는 징역 6개월 실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