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7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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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一運動 |
영어의미역 | The March 1st Movement |
이칭/별칭 | 3·1 만세 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선화 |
[정의]
1919년 3월 11일부터 4월 하순까지 부산 일대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개설]
부산 3·1 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가던 3·1 운동의 소식을 접하고, 부산 시민들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3월 11일부터 4월 하순까지 부산 각지에서 일어난 항일 독립 운동이다.
[역사적 배경]
첫 개항지로서 일제의 조선 침략에 교두보 역할을 했던 부산은 바로 그런 이유로 민족 모순이 첨예한 지역이었다. 서울의 만세 시위 소식이 전해지면서 부산과 마산에서도 3일 경에 독립 선언서가 배포되고, 서울에서 학생 대표가 내려와 부산상업학교와 동래고등보통학교에 독립 선언서 등을 전달하였다. 이에 따라 부산 지역의 학교를 중심으로 시위가 시작되었다.
[경과]
부산의 3·1 운동은 3일 독립 선언서 배포 이후 3월 11일 일신여학교를 시작으로 부산과 동래 전체로 확산되었다. 13일은 동래 장터에서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과 지역 유지, 상인들을 중심으로, 18일과 19일에는 명정학교와 범어사 지방학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서 시위가 이어졌다.
동래 장터의 시위 소식은 구포와 기장으로 전해져 3월 29일 구포, 4월 5·10일은 기장읍, 9일은 기장 좌천 장터, 11일은 기장 일광면에서 3·1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4월 10일 명지면에서는 사립동명학교 교사와 학생이 중심이 된 시위가 다음날까지 이어졌으며 가덕진에서도 11일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러한 시위는 학생들의 동맹 휴업과 의열 청년들의 열차 투석, 전차 운전수의 파업, 만철관리국 철도공장 초량분공장 조선인 노동자의 파업으로 이어졌다.
[결과]
3월 11일부터 4월 하순까지 진행된 부산의 3·1 운동은 학생을 중심으로 지역 유지층, 의열 청년, 노동자, 농민, 상인 등 각 계층을 망라해 참여하였고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많은 애국 지사가 검거되었다. 특히 구포 장터와 기장 좌천 장터 시위에서는 경찰의 발포가 자행되어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의의와 평가]
부산의 3·1 운동은 3월 3일 독립 선언서 배포를 시작으로 4월 말까지 2개월 가까이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도시를 중심으로 민족 대표 측과 관련된 종교계와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군·면 농촌 지역으로 확장되었으며 주체도 농어민과 노동자들로 이어지면서 대표적 탄압 기구인 경찰서를 공격하는 등 투쟁 양상이 가열되었다. 이러한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은 1920년대 이후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파 사건 등 의열단 활동과 청년 학생 운동, 신간회, 노동·농민 항쟁으로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