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707
한자 金炯璣
영어음역 Gim Hyeonggi
이칭/별칭 동산(東山)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하유식서용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언론인
성별
본관 김녕(金寧)
대표경력 동산의원 운영
출생 시기/일시 1896년 8월 9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1년 - 사립명진학교 수학
수학 시기/일시 1916년 - 경성의학전문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22년 -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일 - 서울에서 3·1 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11월 6일 -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음
활동 시기/일시 1926년 - 동산의원 개원
활동 시기/일시 1945년 12월 5일 - 『대중 신문』 창간
활동 시기/일시 1946년 3월 -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남위원장
활동 시기/일시 1950년 8월 20일 - 정보기관에 연행됨
추모 시기/일시 1998년 - ‘애국지사 동산 김형기 선생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90년 8월 15일연표보기 -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
거주|이주지 경상남도 양산군 상북면 외석리
학교|수학지 경성의학전문학교 - 서울특별시
활동지 『대중 신문』 -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묘소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정의]

일제 강점기와 현대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의사, 『대중 신문』 발행인으로 활약한 언론인.

[가계]

본관은 김녕(金寧). 호는 동산(東山). 입향조는 유헌(柳軒) 김영필(金永弼)이다. 김영필은 사육신 김문기(金文起)가 참형을 당하자 충청북도 영동에서 낙동강 하구의 유도(柳島)인 유두리 강변으로 옮겨 와 정착하였다. 김형기(金炯璣)김영필의 13세손이다. 김형기는 1896년 8월 9일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당시 경상남도 양산군 좌이면 유두리]에서 김욱권(金昱權)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은 1918년에 유두리에서 경상남도 양산군 상북면 외석리로 이사하였다. 한글학자이자 부산 기장 출신 독립운동가 김두봉(金枓奉)과는 외사촌간이고, 기장 출신 독립운동가 박일형(朴日馨)이 그의 사위이다.

[활동 사항]

김형기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천석꾼이었던 아버지가 개화 바람을 타고 광산업에 종사하다 실패하면서 사상의 땅과 가산을 모두 탕진하였다. 결국 집안은 경상남도 양산군 상북면 외석리로 옮겨갔다. 1911년 16세에 사상의 지주인 지씨(池氏)의 딸과 결혼하고 처가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사립명진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에는 동래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김형기는 재경 유학생 회장으로서 경성의학전문학교 4학년 재학 중에 3·1 운동에 참여했는데, 당시 민족 대표 33인과 연결하여 학생들을 규합하고 서울 파고다 공원[현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우여곡절 끝에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울산과 기장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기장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김약수(金若水), 곽상훈(郭尙勳) 등과 교우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1926년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에 동산의원(東山醫院)을 개원하였다. 동산의원에는 최천택(崔天澤), 박희창, 이기주, 오상순 등 일제 강점기 부산과 경상남도 지역에서 항일 활동을 하던 인물들이 자주 출입하였다. 해방 3년 전인 1942년에 중구 대청동 남일초등학교 정문 앞으로 병원을 옮겨 해방 이후까지 같은 장소에서 병원을 운영하였다. 김형기는 병원 수입으로 해방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당시 동산의원은 부산과 경상남도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거점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후 김형기는 서상권, 김칠성(金七星), 김재준(金在俊) 등과 함께 미군정청 경상남도 경남도고문회의 고문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가 귀환 동포를 구호하기 위해 조직한 ‘귀환동포경남구호회’의 위원장을 맡아 구호 활동도 전개하였다. 1945년 12월 5일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에서 『대중 신문』을 창간하여, 1년 6개월간 발행인으로서 언론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대중 신문』은 타블로이드판 2면으로 논지는 중도 노선에 속하였으나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당시의 정치 상황 속에서 김형기는 사찰 당국으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를 받았다. 결국 ‘향후 정치에 일체 관여하지 않고 본분인 의사로서 충실할 것’이라는 자신 명의의 성명서를 신문에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46년에는 신탁통치배격위원회 재무부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3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남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으로도 선출되었으며, 조선민족혁명당 경상남도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46년 4월 9일에는 군정 법령 제55호 ‘정당 등록법’ 위반 혐의로 수사 기관에 잡혀가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이 활발한 정치·사회 활동을 벌이던 김형기는 6·25 전쟁 중 좌익계로 분류되어 부산광역시 중구 부평동의 사촌 동생 집에서 정보기관에 연행되었다.

6·25 전쟁의 와중에서 이승만(李承晩) 정권은 비판적 지식인을 불법으로 감금하고 학살하였는데, 특히 1950년 여름 낙동강 전선을 사이에 두고 전투가 치열했을 때 탄압이 극에 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보기관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한 후 행방불명되어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였다. 김형기는 일제 강점기 3·1 운동을 주도하다가 옥고를 치르는가 하면 의사로서 수많은 독립운동가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 공간에서 양심적이고 민족주의적 길을 추구하였던 행적이 이념 대립의 와중에 좌파 인물로 몰려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묘소]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성천 마을에 가묘(假墓)가 조성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990년 8월 15일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부산광역시 사상구 모라3동 115번지 김녕 김씨 유두 문중 재실인 유헌재(柳軒齋) 정원에 대한광복회와 낙동문화원, 김녕 김씨 유두 문중이 1998년에 함께 세운 ‘애국지사 동산 김형기 선생비’가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