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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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女碑 |
영어의미역 | Stone Monument for a Virtuous Lady |
이칭/별칭 | 의녀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시장길 27[복천동 229-78]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정형 |
[정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송공단에 있는 조선 후기 두 의녀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개설]
이촌녀(二村女)라고도 기록된 두 의녀(義女)는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 싸움터에서 무기가 부족하자 동래부의 백성이던 김상(金祥)이라는 남자와 함께 기와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무기 삼아 적과 맞서 싸우다 순직한 이름 모를 두 명의 여성을 말한다. 두 명의 의녀가 기와를 벗겨 김상에게 깨어 주고, 김상은 그것을 던져 외적을 죽였다. 두 의녀는 누구의 아내 혹은 딸인지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적들이 떠난 뒤에 김상의 어머니가 가서 보니 두 의녀는 김상과 같이 나란히 죽어 있었고, 세 명의 적이 그들 옆에 죽어 있어 두 의녀와 김상이 죽인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두 의녀는 17세기 전반쯤 농주산 전망 제단에 모셔졌고, 1742년(영조 18) 이 제단을 옛 정원루 터에 옮겨 송공단(宋公壇)을 세울 때도 모셔진 뒤 오늘날까지 송공단의 별단 1단에 의녀위(義女位)라고 쓴 두 개의 비석으로 따로 모셔져 있다.
또한 두 의녀는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 싸움, 부산진성 전투, 부산포 해전과 같은 동래부 지역 안의 싸움에서 순사하였거나 공을 세운 사람, 혹은 동래부 출신으로 다른 지역에서 의병 활동 등으로 순직하였거나 공을 세운 사람들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충렬사 의열각(義烈閣)에도 모셔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건립 경위]
의녀비(義女碑)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 부산진 첨사 정발(鄭撥)을 모시고 제사 지내기 위해 17세기 전반쯤에 동래읍성 남문 밖 농주산에 전망 제단을 설치하고 양산 군수 조영규(趙英圭), 동래 향교 교수 노개방(盧盖邦) 등 순절한 여러 사람들을 차례로 모시게 될 때 건립된 것이 아닌가 한다. 1742년 동래 부사 김석일(金錫一)이 농주산 전망 제단을 옛 정원루 터로 옮겨 동서남북으로 4단을 쌓고, 담을 둘러 남쪽에 문을 두고 단의 이름을 송공단이라고 할 때 남단(南壇)으로 이전되었다.
옛 정원루 터는 임진왜란 때 동래 부사 송상현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순절한 곳이라고 한다. 1766년(영조 42) 동래 부사 강필리(姜必履)가 송공단을 고쳐 쌓을 때는 동쪽 2단으로 옮겨졌고, 1767년(영조 43) 송공단을 다시 고쳐 쌓아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에서 순절한 분들만을 모시게 될 때는 서단의 서쪽에 따로 만든 별단 1단에 모셔졌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 시대와 다르게 배치되어 있던 것을 2005년에 1767년과 같이 바로잡아 오늘날에 이른다.
[위치]
의녀비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229-78번지 일원에 있는 송공단 안에 있다.
[형태]
금섬 순난비(金蟾殉難碑)와 의녀비 두 기가 함께 세워진 송공단의 별단 1단은 가로 270㎝, 세로 91㎝, 높이 64㎝ 크기의 직육면체이고, 단 위에 사각형의 좌대(座臺)를 놓고 그 위에 화강암으로 만든 비의 몸돌만을 얹었다. 몸돌의 머리는 반원형으로 다듬었다.
[금석문]
비석에는 ‘의녀위(義女位)’라고 새겨져 있다.
[현황]
의녀비의 서쪽에 있는 금섬 순난비와 별단 2단의 동시사난부녀위(同時死亂婦女位)를 비롯하여 송공단에 있는 7단 15기의 비석 등과 함께 소유자인 부산광역시 동래구에서 관리하고 있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된 송공단의 부속 단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