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216 |
---|---|
한자 | 金井山城 |
영어의미역 | Geumjeongsanseong Fortres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재혁 |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에 있는 조선 후기 금정산에 쌓은 산성.
[개설]
금정산성은 낙동강 하구와 동래 지역이 내려다보이는 요충지에 있으며, 바다로 침입하는 적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우리나라 산성 중에서 가장 규모가 광대한 성곽이다. 성벽은 금정산에 많은 화강암을 자연석 그대로 지형의 굴곡과 높낮이에 따라 쌓았다.
금정산에 언제부터 성을 쌓았는지 알 수 없으나, 고대에 남해안과 낙동강 하류에 왜구의 침입이 심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신라 때부터 이미 성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고, 일부의 유구(遺構)를 두고 신라 시대에 성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1667년(현종 8) 현종(玄宗)이 통제사 이지형(李枝馨)을 불러들여 왜구의 침략을 방어할 계책을 강구하는 가운데 금정산성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보아 1703년 이전에 이미 성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성이 신라 때부터 있었던 성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현재의 성은 1703년에 준공한 것이다.
산성 수비는 동래부사가 맡았는데, 평상시에는 중군(中軍), 승병장(僧兵將), 군기감(軍器監), 도계도(都計導), 군뢰(軍牢), 문직(門直) 등의 직책을 가진 자와 군병 등의 상비군 및 인근 사찰의 승려가, 유사시에는 동래, 양산, 기장 등 3개 읍 소속 군과 3개 읍 소재 사찰의 승려들이 군사로 차출되어 방어하도록 되어 있다.
[건립 경위]
금정산에 산성을 축조하자는 논의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국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여러 차례 대두하였다. 그러다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1702년(숙종 28)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이 청하여 1703년에 준공되었다.
[위치]
금정산성은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과 금정구 금성동 일대에 위치한다.
[형태]
1703년 당시 완공된 성은 둘레 1만 6383m, 높이 30㎝로, 동서남북 4곳에 성문을 둔 방대한 산성이었다. 특히 서문에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 시설인 적대(敵臺)를 성문 양쪽에 설치하였으며, 서문 오른쪽에는 3개의 아치형으로 된 홍예수구(虹霓水口)를 설치하여 성안의 물이 밖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뒤 1707년(숙종 33) 동래부사 한배하(韓配夏)가 성이 너무 넓다 하여 남북 두 구역으로 구분하는 중성(中城)을 쌓고, 장대(將臺), 군기고(軍器庫) 등의 시설을 보강하였다. 금정산성은 일제 강점기에 관아 건물 등이 파괴되고, 몰수당하였다고 한다. 1972년부터 복원 사업을 시작하여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의 문루와 망루 3개소가 복원되었다.
금정산성 4대문은 동·서·문·북문으로 불리어 오다가, 축조된 지 314년 만에 이름을 갖게 되었다. 부산 금정구는 2016년 12월 ‘편액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4대문에 3개씩의 명칭 후보를 확정하고, 온라인과 현장조사를 실시하였다. 2017년 3월 17일 동문을 관해문(關海門), 서문을 해월문(海月門), 남문을 명해문(鳴海門), 북문을 세심문(洗心門)으로 확정하였다. 서체는 1703년(숙종 29) 『조선왕조실록』에서 4대문 편액에 사용된 한자 서체를 그대로 따와 새겼다.
[현황]
부산광역시는 현재 연차적으로 성곽, 성문, 망루 등 성곽 시설을 보수, 정비하고 있다. 1971년 2월 9일 사적 제21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금정산성은 조선 후기 국방사 및 성곽 연구에 중요한 문화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