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0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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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朱敬愛 |
영어음역 | Ju Gyeongae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정공단로17번길 17[좌천동 768-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경숙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주경애(朱敬愛)[1898~?]는 1898년에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부산진일신여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서울에서 시작된 3·1 운동은 곧바로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부산에서도 서울의 학생들이 부산 지역 학생들에게 만세 시위를 격려하면서 비밀리에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3월 10일 전단을 발견한 부산진일신여학교 고등과 3학년 김응수(金應守)가 주경애에게 전단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주경애는 학생을 시켜 부산제2상업학교[구 부산상업고등학교, 현 개성고등학교]에 연락하는 한편 동료 교사들을 규합하여 만세 시위 참가를 결의한 뒤 이 사실을 고등과 학생들에게 알렸다.
이에 교사 박시연(朴時淵)과 부산진일신여학교 고등과 4학년 김반수(金班守)·심순의(沈順義)·김봉애(金奉愛)·김복선(金福善), 고등과 3학년 김응수, 고등과 2학년 김난줄(金蘭茁)·김신복(金新福), 고등과 1학년 이명시(李明施)·송명진(宋明進), 학년 미상 김순이(金順伊)·박정수(朴貞守) 등의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나섰다.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11일 저녁 9시경 부산진일신여학교 학생들은 태극기를 손에 들고 좌천동 일대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부산진일신여학교의 만세 시위는 부산 지역 3·1 운동의 효시이며, 일제의 조선 침략에서 교두보 역할을 하며 개발되었던 부산 지역이 동일한 이유로 민족 모순이 가장 첨예한 현장이 되었음을 드러내는 일대 사건이었다. 주경애는 시위가 끝난 후 초량으로 피신하여 체포를 면하였으나, 학생들이 모두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2일 오후 1시에 자진하여 파출소에 출두하였다.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 받아, 같은 형량을 선고 받은 교사 박시연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5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부산진일신여학교 7회 졸업생들은 1919년 3월로 예정된 졸업식을 주경애, 박시연 두 교사의 출옥 때까지 미루었다. 이에 이듬해인 1920년 봄에 8회 졸업생의 졸업식을 먼저 치른 뒤에 두 교사가 참석한 가운데 7회 졸업식을 거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