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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구의 세거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319
한자 沙下區-世居地
영어의미역 Residential Place in Saha-gu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사하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현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씨 세거지 부산광역시 사하구

[정의]

부산광역시 사하구에 있는 성씨 세거지.

[개설]

사하구는 북쪽으로 금정산맥에서 이어진 산지가 발달하며 구덕산승학산 등으로 이어진다. 동쪽은 구덕산에서 시약산으로 이어지지만 산록 아래로 연결되어 있다. 남쪽은 바다와 접하며 대부분 급경사의 암석 해안을 이룬다. 서쪽은 낙동강 하류와 남해가 경계를 이루는 낙동강 하구로 삼각주 지형이 발달하였는데, 특히 대표적인 하중도(河中島)인 일웅도을숙도가 있다. 관내에는 구덕산에서 발원한 괴정천승학산에서 발원한 당리천 등 산지에서 발원한 여러 하천이 서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하거나 일부는 남해로 흘러 들어간다. 시가지는 해안가나 하천 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이러한 지형을 갖춘 사하구에서는 일찍부터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유적지가 신석기 시대를 비롯한 삼한 및 가야 시대의 유적인 다대포 조개더미와 청동기 시대의 유적인 괴정 1동·괴정 2동 유적, 감천동 고인돌 등이다. 다대포는 조선 시대에 군사 항구 다대진이 설치되어 한일 관계의 중요 지역으로 자리 잡았다.

[다대포의 대표 토성]

다대포 지역의 대표 토성은 파평 윤씨(坡平尹氏)경주 이씨(慶州李氏)다. 두 성씨는 임진왜란 당시 다대성 내에 거주했던 사민(士民)의 실세들로, 이들이 집단으로 피난하였던 지역의 지명이 지금도 남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윤씨 일족이 다대포 서쪽 산속 안골내[內谷川] 근처에서 난을 피해 생명을 유지하였다고 하여 그때부터 안골내가 ‘윤씨내’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까지 그대로 불린다.

임진왜란 당시 경주 이씨파평 윤씨와는 반대쪽인 다대포 북산 계곡의 못골[池谷]로 피신하였는데, 지금도 이씨 일족이 피신하였던 못이 있던 계곡[현 다대암 근처]을 ‘이못골’이라 부른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이 지역은 대부분 폐허가 되고, 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청주 한씨(淸州韓氏)를 비롯한 경주 최씨(慶州崔氏), 순흥 안씨(順興安氏) 등이 유입되었다.

[변천 및 현황]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1904]에 따르면, 이 시기 동래군사하면을 포함한 12면 154동으로 편재되어 있었다. 동래군의 전체 호수는 4,871가구였다. 동래군 주민의 성씨는 대략 84성 정도였으며, 김씨와 이씨, 박씨, 정씨, 최씨 등의 순으로 호수가 많았다. 1904년 무렵 사하 지역 성씨는 모두 53개였다. 이를 좀 더 세분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904년 다대동의 호수는 108가구였다. 이 중에서 김씨 22가구, 이씨가 21가구로 그 뒤를 이었다. 10가구가 넘는 성씨는 한씨(韓氏)와 박씨(朴氏)였다. 그 외 안씨, 정씨(鄭氏), 강씨, 황씨, 배씨 등이 있었다. 장림동의 호수는 20가구였다. 규모가 작은 동네였으나 임진왜란 이전부터 진이 설치되어 수군이 주둔하였다.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다대진이 이곳 장림에 있었다고 전한다. 장림에는 조씨(趙氏)가 5가구로 가장 많이 살았으며, 그 외 김씨 4가구, 이씨 2가구, 윤씨·안씨·허씨·정씨(鄭氏)·문씨·배씨가 각각 1가구씩이었다.

구평동『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에 서평동으로 나와 있다. 이곳의 호수는 13가구로, 박씨·최씨·전씨(田氏)가 각각 2가구였고 이씨·김씨·임씨(林氏)·조씨·손씨가 각각 1가구였다. 신평동의 호수는 29가구다. 이 중 임씨가 14가구로 가장 많았다. 김씨와 배씨가 각각 3가구, 서씨·박씨·최씨·구씨 각각 2가구, 그리고 정씨(丁氏)가 1가구였다.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역적으로 몰려 9촌까지 몰살당하였을 때, 조카인 임중생이 의주에서 신평까지 피신하였다는 것이 바로 임씨 세거지의 기록이다.

하단동의 호수는 17가구였으며, 김씨와 이씨가 각각 4가구와 2가구 살았다. 그 외 박씨, 원씨, 백씨, 배씨, 한씨, 전씨, 구씨, 채씨, 손씨, 강씨, 윤씨가 각각 1가구씩 거주하였다. 1904년 평림동으로 기록되어 있는 곳이 있는데, 지금의 하단동 내에 들어가는 지역이다. 평림동의 호수는 65가구이다. 가장 많은 성씨는 김씨로 13가구였다. 그 뒤를 이어 이씨 9가구, 박씨 8가구, 서씨 7가구, 장씨 4가구가 살았다.

감천리는 45가구가 살았다. 이씨가 12가구로 가장 많이 살았고, 박씨와 김씨가 각각 8가구였다. 문씨와 윤씨는 각각 4가구, 황씨는 3가구, 정씨(鄭氏)·추씨·안씨·옥씨·장씨·송씨가 각각 1가구였다. 감천에 가장 먼저 이주한 성씨는 인동 장씨(仁同張氏)고, 그다음에 밀양 박씨(密陽朴氏)경주 이씨가 들어왔다.

괴정동대치리와 함께 97가구가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치리는 박씨 15가구, 김씨 8가구, 이씨 6가구였고, 괴정동은 문씨와 김씨가 각각 11가구, 유씨 8가구, 이씨와 송씨가 각각 5가구, 조씨 4가구, 정씨 3가구, 박씨와 배씨 각각 2가구, 왕씨·최씨·강씨·한씨가 각각 1가구였다. 당리동은 18가구가 살았다. 김씨가 3가구, 이씨와 최씨가 각각 2가구, 양씨·홍씨·임씨·배씨·차씨 등이 각각 1가구였다.

부산의 세거지 흔적은 1934년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의 성(姓)』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자료는 기재 기준이 15가구 이상이라는 한계점을 지닌다. 이러한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이 자료에는 사하구와 관련한 기록이 누락되어 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사하구 지역에 많은 성씨가 들어왔다. 대표적으로 제주도 등지에서 고씨·부씨·양씨 등이 해산물 채취를 위하여 다대포로 이주하여 정착하였고, 거제도에서도 연고를 따라 전씨·옥씨·강씨 등이 많이 이주하여 대를 이으면서 오늘의 다대포 토착민이 되었다.

이 중 현재 파악되는 세거지는 1720년경 기장군 반룡리에서 다대포로 이주하여 정착한 청주 한씨(淸州韓氏) 세거지로, 입향조는 한도남이다. 이 집안의 유명 인물은 다대포 어민의 지위를 향상시킨 다대진 관리 한광국(韓光國)이다. 이외 현 다대초등학교 전신인 다대사립실용학교를 설립한 교육자 한경범(韓璟範)[1826~ 1913], 사하 면장[현 구청장에 해당]을 지낸 한오동(韓㻍東)[1894~1963], 일제 강점기 신사 참배를 거부한 종교 지도자 한상동(韓尙東)[1901~1978] 등을 들 수 있다.

다대동순흥 안씨(順興安氏)임진왜란 이후에 들어온 순흥 안씨 1파로, 유명 인물로는 지중추부사 안계덕(安溎德)과 그의 아들 안혁진·안혁규를 들 수 있다. 안혁진과 안혁규도 아버지를 따라 다대진에서 수군 군관을 지내는 등 전통적인 무장 집안이다. 감천동경주 이씨는 1600년대 전반에 입향하여 현재까지 입향조 무덤을 근처에 두고 묘사를 지낼 정도로 문중을 잘 운영하고 있다.

향후 사하구 지역은 도시 개발로 인하여 전통 공간의 해체가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결국 성씨 세거지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므로 이에 대한 각 문중의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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