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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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神社參拜 |
영어의미역 | Worship for Shinto Shrin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동일 |
[정의]
1935년 이후 부산 지역을 비롯한 전국에 강요된 신사(神社)에 대한 참배.
[역사적 배경]
중일 전쟁 이후 일제는 우리 민족의 독자성과 고유성을 부정하고, 이른바 황국 신민화를 통한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실시되었다. 신사란 일본 왕실의 조상신이나 국가 공로자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일제는 국권 강탈 후 신사 사원 규칙을 발표하고 서울에 조선 신궁(朝鮮神宮)을 세우는 한편 각 지방에 신사를 세웠다. 조선인에게 신사 참배를 강요한 것은 1935년경부터이다.
[경과]
부산은 조선 시대부터 초량 왜관이 있었던 만큼, 1876년 개항 이전부터 신사가 설립 운영되었고, 이후에도 여러 곳에 신사가 설립되었다. 초량 왜관 시절 용두산을 중심으로 하는 변재신사(辨才神社), 도하신사(稻荷神社), 금도비라신사(金刀比羅神社), 조비나신사(朝比奈神社)와 용미산의 옥수신사 등 전체 5개의 신사가 있었다. 그리고 신사에 모셔진 신은 용두산을 중심으로 재물[변재천신사], 상업[도하신사], 항해의 안녕[금도비라신사·조비나신사] 등과 관련된 신들이었다.
초량 왜관 당시의 5개 신사는 보존 상태가 그다지 양호한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개항 후 일본인들은 부산의 신사들을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1899년 7월 용두산 신사를 개건하여 천궁식을 거행하고 신사의 명칭 또한 용두산 신사로 개칭하였다. 이때부터 용두산 신사란 명칭이 통용되었다. 1899년 7월 8일 용미산의 옥수신사를 용미산 신사로 개칭하였다.
1907년 무렵 부산에는 용두산 자락에 용두산 신사, 변재신사, 동도하신사, 서도하신사 등이, 용미산 쪽에는 용미산 신사, 그리고 영도와 남포동 방면에 질자신사와 수산신사 등 전체 7개의 신사가 설립되어 있었다. 일제의 국권 강탈이 있기 전에 이미 이렇게 많은 신사들이 있었던 곳은 부산이 유일할 것이다. 1916년 10월 15일 용두산 공원이 오늘날의 모습으로 조성되면서 용두산 신사도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용두산 신사와 용두산 공원에서는 매년 4월 신행식과 천황의 즉위를 기념하는 어대전 봉축 행사가 개최되는 현장이었다.
하지만 1935년 한국인에게 신사 참배가 강요되면서 이에 대한 저항이 일어났다. 기독교 평북노회를 시작으로 평안도에서 전국 각지로 전개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에는 평안남도의 주기철(朱基徹), 평안북도의 이기선(李基善)·이주원(李朱元), 경상남도의 한상동(韓尙東, 韓相東) 등이 참여하였다.
부산과 경상남도에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인물로는 한상동 목사를 비롯해 최상림(崔尙林) 목사, 주남고(朱南睾) 목사, 이현속(李鉉續) 장로, 조수옥(趙壽玉), 김차숙, 한정교, 이정, 윤술룡, 이인제(李仁濟)[본명 이주원(李朱元)], 백영옥, 김현숙, 배학수 등이었다. 이 가운데 윤술룡과 같이 뒤에 전향한 인물도 있었지만, 최상림 목사는 진주경찰서에서 부산으로 이송된 뒤, 다시 평양으로 이송되어 옥중 생활 중 순교하였다. 이현속 장로도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결과]
초기와 달리 종교인의 신사 참배는 점차 늘어났으며, 신사 참배는 일반적으로 시행되기에 이르렀으나 일제의 패망과 함께 소멸하였다.
[의의와 평가]
신사와 신사 참배는 일본의 고유한 종교 의식과 전통을 보여주는 측면이 있기도 하지만, 사고 체계가 다른 한국인에게 폭력적으로 강요하면서 종교가 질곡이 되는 역사적 경험을 한국사에 제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