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3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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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日報 |
영어의미역 | Busan Ilbo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 |
유형 | 문헌/연속 간행물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중앙대로 365[수정동 1-10] 부산일보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은진 |
[정의]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 부산일보사에서 발행하는 일간지.
[창간 경위]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의 일본인 발행 언론인 『부산 일보』가 광복으로 폐간되고 1946년 5월 29일 적산(敵産)인 부산일보 사옥[대창정 4정목,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4가]의 관리권이 박수형(朴洙衡)에게 불하(拂下)되었다. 이에 따라 1946년 6월 3일 재조선미육군사령부 군정청[미군정청]은 부산일보의 사옥에서 운영되던 민주중보[민주신보 전신]에 퇴거를 명하였다.
이후 관리권을 획득한 박수형이 하원준의 자금 출자를 받아 1946년 9월 10일 『부산 일보』를 창간하였다. 『부산 일보』는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의 일본인 발행 언론이었던 일문지(日文紙) 『부산 일보』의 제호(題號)와 제자(題字)를 그대로 이어 사용하였다.
[형태]
대판[39.1×54.5㎝]으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석간 발행되며 일 발행 면수는 24~40면이다.
[구성/내용]
『부산 일보』의 지면은 종합면[1, 2면], 정치·해설면, 국제면, 경제면, 사회면, 스포츠면, 문화면 등으로 구성된다. 『부산 일보』 웹 사이트는 뉴스, 오피니언, 경제 해양, 스포츠, 연예, 라이프, TV-U 등으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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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과 현황]
해방 후 박수형과 하원준 등이 1946년 9월 10일 타블로이드판[25.4×37.4㎝] 2면[창간호 4면] 신문을 발간하였다. 창간 인원은 70명이며 이 가운데 편집국 국원은 15명이었다. 취재부는 경상남도, 부산시, 세관, 상공회의소[일반 경제], 각 경찰서[경남도경 중부서 북부서], 군 출입 기자 7명과 데스크로 구성되었다. 사진부는 2~3명, 조사부는 1명이었다. 1949년 5월 신문 판형을 국제 규격인 B3판[51.5×36.4㎝]으로 교체하고 같은 해 김지태(金智泰)가 부산일보를 인수하여 10월 대중신문과 통합하였다.
6·25 전쟁 시기 임시 수도가 부산으로 옮겨오면서 전국지로 발돋움 하게 되었다. 해외 주요 통신사의 뉴스 공급처가 되었고, 전황 보도 특종 등으로 당시 최대 부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1951년 1월 20일부터 2년간 미국 국방부 기관지 『성조지(Stars and Stripes)』에 사옥 시설을 징발 당하였다. 1월 21일자부터 신문을 발행하지 못하고 1월 28일자부터 부산시 중부 남포동[현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2가 19번지] 임시 사옥에서 속간하였다. 1951년 4월 22일 부산시 중부 충무동[현 부산광역시 서구 충무동 3가 101번지]에 임시 사옥을 마련하였다. 1953년 1월 27일 징발령이 해제되어 2월 13일 중앙동 사옥으로 복귀하였다.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 앞 대화재로 사옥이 전소되기도 했다. 1958년 조·석간 6면을 발행하였다. 1958년 1월 최초의 영화상 제도인 ‘부일 영화상’을 제정하였다. 1959년 부산문화방송을 인수함으로써 신문과 방송의 입체적 보도라는 새 지평을 열었다. 1959년 9월 지역 신문 최초로 서울지사를 설치했다. 1962년 6월 20일 부산일보의 주식 전부가 5·16 장학회[현 정수장학회]에 귀속되었다. 1963년 2월 20일 부산직할시 중구 중앙동 4가 53-17로 사옥을 이전하였다. 1964년 9월 1일 주 1회 운영되던 어린이면을 분리, 『소년 부일』을 창간하였다. 타블로이드판 4면으로 격일 간 발행되었던 『소년 부일』은 1965년 6월 30일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폐간되었다. 부일 영화상이 1973년 16회 시상식 이후 중단되었다. 1978년 6월 1일 타블로이드판 『주간 부산』을 창간하였다. 1980년 언론 통폐합 과정에서 7월 30일 등록이 취소되고 8월 10일 폐간되었다.
1980년 12월 1일 언론 기관 통폐합 정책으로 국제신문을 흡수, 통합하면서 제호가 한글에서 한자로 바뀌었다. 1984년 12월 30일 부산직할시 동구 수정동 1-10번지[2012년 현재 위치]로 사옥을 이전하였다. 1988년 7월 11일 부산일보 노동조합이 국내 언론사 최초로 파업하였다. 1998년 7월 16일 타결되어 편집국장 노조 3인 추천제를 통해 편집권 독립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1990년 11월 1일 진주지사 사옥을 준공하였다. 1993년 10월 2일 전면 CTS[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 전산 제작, 전자 편집, 자동 조판 시스템]를 실시하였다. 1994년 12월 28일 부산직할시 금정구 구서동에 제2사옥을 준공하였다. 1998년 5월 6일 전면 가로 쓰기를 시행하였다. 자회사로 1998년 9월 4일 광고 대행업 부일IS를, 2003년 10월 1일 부일인쇄를 설립하였다. 2004년 4월 제호를 한글로 바꾸고 서체와 로고를 교체하였다. 2008년 3월 25일 정보 통신 사업 Blnet를 설립하였다. 2008년 부일 영화상이 17회로 재개되었다. 2009년 2월 11일 『부산 일보』 지령 200,000호를 발행하였다.
[의의와 평가]
1960년 4월 12일 『부산 일보』 1면에 실린 사진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만에 떠오른 김주열군의 시신 사진’은 4·19혁명으로 이어져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AP를 통해 전 세계로 타전된 이 사진은 한국 언론사의 특종으로 꼽힌다. 또한 부산일보는 1988년 7월 11일 한국 언론 사상 초유의 파업을 단행해 편집권 독립을 이루었다. 당시 6일간의 파업은 언론 자유의 깃발을 올린 신호탄으로 평가된다. 명실 공히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경상남도를 아우르는 동남권 대표 신문으로 자리매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