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9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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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敎育 |
영어의미역 | Education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안경식 |
[정의]
전근대기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부산 지역 교육의 역사와 현황.
[개설]
부산 지역 교육의 역사와 현황을 각각 학교 교육, 사회 교육, 특수 교육, 평생 교육, 유아 교육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학교 교육]
1. 조선 시대
조선 시대 이전 부산 지역의 교육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조선 시대에는 각 지방에 관학으로 향교가 설치되었는데, 부산에도 동래 향교(東萊鄕校)[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와 기장 향교(機張鄕校)[현 기장군 기장읍 교리]가 설치되었다. 또 서원으로는 안락 서원(安樂書院)[현 동래구 안락동]이 있는데, 안락 서원은 일반 서원과 달리 임진왜란 때 순사한 송상현(宋象賢)을 봉사하기 위해 설치한 송공사(宋公祠)에서 시작하여, 그 뒤 충렬사(忠烈祠)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1652년(효종 3)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강당과 동서 양재를 지어 서원으로서 출발하게 되었다.
그 밖에 곳곳에 서당이 있었는데, 이름 있는 서당으로는 1732년(영조 8)에 동래 부사 정언섭(鄭彦燮)이 읍성을 쌓은 기념으로 만든 시술재(時述齋)가 있다. 근대의 서당으로는 고관이 있던 지역에 구관(舊館)서당이 있었는데 개성학교의 구관 지교(支校)가 되었고, 부산진서당은 개성학교의 부산진 지교가 되었다가 뒤에 부산진보통학교로 발전하였다.
2. 개항기
개항기 부산 지역의 근대 교육 기관으로는 박기종(朴琪淙)이 1895년(고종 32)에 설립한 사립부산개성학교[1907년 재정난으로 공립으로 이관]가 있었고, 뒤이어 1907년(순종 1)에 공립동래보통학교가, 1909년(순종 3)에는 공립부산보통학교와 사립부산진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한편 기독교 계통의 학교로는 1895년에 부산진일신여학교가 호주장로회 여자선교연합회의 멘지스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이는 당시 부산·경상남도 지역 최초의 여자 학교였다.
1898년(고종 35)에 동래부학교가 설립되었고, 1904년(고종 41)에는 개성학교 교장인 아라나미 헤이지로[荒波平治郞]이 주선하여 초등 과정의 개양학교(開揚學校)가 설립되었는데, 동래기영회(東萊耆英會) 회원들이 반발하여 이에 대항하는 삼락학교(三樂學校)를 1906년(고종 43)에 세우자 개양학교는 삼락학교에 편입되고 해산되었다. 그 뒤 삼락학교는 동명학교[1907년]로 개명하였다가, 사립동래고등보통학교[1916년], 공립동래보통학교[1922년], 동래중학교[1938년] 등으로 명칭 변경을 거치게 되었다.
1899년(고종 36)에는 부산진 지역의 유지들이 운영하던 육영재[일명 육영학교]가 공립부산개성학교[사립부산개성학교가 재정난으로 1897년 공립 학교로 전환된 학교]의 부산진 지교가 되었다. 1909년에 부산진 지교는 사립부산진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았다가 1911년 4월에 사립좌천학교를 흡수 통합하였으며, 그해 11월에 부산진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1902년(고종 39)에는 다대포사립실용학교가 설립되었고, 1907년에는 사립구명학교가 구포에서 설립되었다. 1908년(순종 2) 5월에는 부산진부인회 후원 학교인 양정숙(養貞塾)이 개설되었으며[뒤에 부산진보통학교 분교장이 됨], 같은 해에 영도에서 사립옥성학교[현 영도초등학교]가 설립되었고, 그해에 사립명정학교가 범어사(梵魚寺) 금어암에서 개교하였다. 같은 해에 사립양정학교[현 사하초등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09년에는 명지에 사립동명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밖에 일본인 학교로 1867년(고종 4)에 수제학교(修齊學校)가 설립되었으며[이후 부산공립소학교, 부산공립심상소학교, 부산제1공립심상소학교 등으로 개칭], 1905년(고종 42)에는 초량에 초량심상소학교가 설립되었다[뒤에 부산제3공립심상소학교가 됨]. 1908년에는 영도에 부산심상소학교 분교가 설치되었고[1910년에 목도심상소학교로 승격, 뒷날 부산제4공립심상소학교가 됨], 1906년에 부산고등소학교가 대청동에서 설립되었다[1908년에 심상과를 병치하였다가 1910년에 심상과가 부산제2공립심상소학교가 되었으며, 고등과는 부산제5공립심상소학교가 됨. 중등학교로 1906년에 부산공립상업학교, 부산공립고등여학교를 설립].
3.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초 부산부(釜山府)에는 공립부산실업학교와 공립부산보통학교, 공립동래보통학교의 3개 공립 학교가 있었으며, 사립 학교로는 사립동래동명학교와 부산진일신여학교, 사립부산진보통학교 외에 다대포실용학교, 구명학교, 명정학교, 영정학교, 동명학교, 옥성학교, 좌천학교, 초량학교 등이 있었다. 3·1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의 부산부 인구는 7만 4138명으로 한국인이 4만 3423명, 일본인이 3만 499명, 그 외의 외국인이 215명이었다. 이때 부산부 안의 한국인 학생은 부산·부산진보통학교에 673명, 부산공립실업학교에 143명, 부산진일신여학교에 165명이 재학하였으나, 일본인은 유치원에 200명, 6개 소학교에 4,093명, 사립부산상업야학교 등 5개 중등학교에 1,229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1926년에 부산부 내에는 부산·부산진·목도·부민의 4개 보통학교에 3,868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었으며, 부산제2공립상업학교에 391명, 부산진일신여학교 초등부에 197명이 재학하여 당시 한국인 학생 총수는 4,456명이었다. 1926년의 부산 거주 한국인은 6만 4298명이었고, 일본인은 4만 803명이었으며, 일본인 학생 총수는 7,859명으로 갈수록 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1931년에는 1면 1교 확충 계획의 영향으로 남부민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고, 1934년에는 수정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36년에 서면이 부산부에 편입되자 성지공립보통학교가 부산부의 관할에 들어와 공립 보통학교는 7개 교로 늘어났고 학생 수는 7,145명으로 증가하였다. 유치원은 4개 원으로 늘어났는데 모두 사립이었고, 중등학교는 부산제2공립상업학교와 부산공립여자보통학교, 그리고 1931년에 설립된 수정동의 사립공생여학교가 있을 뿐이었다.
일본이 전시 체제를 갖추면서 황민화 정책을 추진하던 시기인 1937년에 초량보통학교와 구덕보통학교가 설립되었고, 1938년에는 남항소학교, 사하국민학교, 적기국민학교, 수영국민학교, 해운대국민학교가 부산부에 편입되어 국민학교가 18개 교로 증가하였다. 그 뒤 다대국민학교와 성북국민학교를 합쳐 광복 당시 20개의 국민학교가 있었다. 한편 일제는 보통학교 확충이 여의치 않자 간이 학교와 학술 강습소 형태의 간이 교육 기관을 세웠는데, 부산부에는 남천, 동삼, 적기, 용연 등에 분교가, 금성동에는 학술 강습소가 설치되었다. 부산 유일의 고등 교육 기관이었던 관립부산고등수산학교는 1941년에 어로, 제조, 양식의 3과 9학급 편성으로 개교하였다.
4. 미군정기
광복 이후 미군정은 한국교육위원회를 조직하고 일반 명령 제4호를 발표하여 1945년 9월 24일부터 공립 초등학교가 개교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부산의 20개 교가 그해 9월 24일에 일제히 개교하였고, 미군정이 같은 해 9월 28일에 각 도에 보낸 통첩에 의해 중등학교 11개 교가 동년 10월 1일 이후 개교하여 광복 이후 첫 교육을 시작하였다. 이때 초등학교는 큰 혼란이 없었으나, 중등학교는 일본인 학교가 많아서 개교 초기에는 일본인 학교에서 수학한 한국인 잔류 학생들을 대상으로 단독 또는 통합 개교하는 등 혼란이 있었다. 또한 그해 11월에 들어서 귀환 동포가 계속 늘어 취학 희망 학생이 급증하게 되었고, 각 중등학교는 수시 입학으로 그들을 수용하게 되었다.
당시 학교 교육에서 화두는 한글 교육이었는데, 부산의 학교 교육 역시 그러하였다. 특히 항고녀[현 경남여자고등학교]에서 열린 한글 강습회에서는 초등·중등 교원이 다수 참석하였고, 국문 강습소 등이 초등학교에 부설되어 문맹 퇴치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또 광복 이후의 좌우익 대립이 학원에서도 재현되었는데, 부산에서도 좌익 계열의 교원협의회와 우익 계열의 경남교원회가 조직되어 대립하였다.
5. 현대
6·25 전쟁 시기의 부산은 후방이 되어 직접 전쟁의 피해를 입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의 학교가 군에 징발되어 교실 없이 해변이나 산과 언덕 등에서 천막 학교, 임간 학교, 해변 학교 등의 형태로 교육을 하게 되었고, 피란민들이 대거 내려와 피란 학교를 산림 곳곳에 개설하게 되었다. 비록 전쟁 중이었지만 1951년 9월에 학제 개편이 있었고, 1952년 6월에는 교육 자치제가 실시되어 부산시 교육위원회가 출범하게 되었다. 또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시험의 국가 연합고사가 실시되기도 하였는데, 이 모든 결정이 당시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이루어졌다.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53년부터 부산에서는 징발된 교실이 환수되기 시작하였고, CAC, ICA, AFAK 등의 협력을 얻어 학교 재건에 나섰으나 교실이 부족하여 한동안 2부제 수업을 실시하게 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는 향토 학교 운동이 전개되어 부산의 많은 학교들도 이 연구 학교로 지정되어 연구 발표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1963년에 부산이 직할시로 승격되자 교육 자치제가 중단되어 교육 행정도 부산직할시의 일반 행정과 병합되었다.
이후 교육 자치제 부활을 위한 다방면의 노력 끝에 1964년 1월부터 교육 자치제가 부활되었고, 부산직할시 교육위원회가 발족하였다. 그리하여 정부가 추진한 경제 성장에 기여하는 교육과 보조를 맞추어 나가면서 부산의 당면 과제인 의무 교육 시설 확충 9개년 계획을 세우는 등의 시책을 추진해 나갔다.
1963년 부산직할시 승격 당시 부산의 학교 수는 245개 교[유치원 32, 초등학교 66, 중학교 41, 인문 고등학교 20, 실업 고등학교 15, 공민학교 58, 고등 공민학교 7, 기술 학교 1, 고등 기술 학교 4, 특수 학교 4]였으며, 학급 수는 4,373개 학급[유치원 59, 초등학교 2,787, 중학교 752, 인문 고등학교 315, 실업 고등학교 222, 공민학교 169, 고등 공민학교 21, 기술 학교 2, 고등 기술학교 28, 특수 학교 18], 학생 수는 30만 7553명[유치원 1,628, 초등학교 21만 6877, 중학교 4만 6580, 인문 고등학교 1만 8900, 실업 고등학교 1만 3320 등], 교원 수는 5,590명[유치원 125, 초등학교 2,920, 중학교 1,208, 인문 고등학교 605, 실업 고등학교 450 등]이었다. 당시 초등학교 취학률은 98.89%였으며, 특수 학교로는 부산맹아학교가 유일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는 중학교 시험 제도를 폐지하고 무시험 전형을 도입하여 교육의 정상화를 도모하게 되었고, 교육의 방침도 경제 개발 정책을 뒷받침할 생산 교육과 아울러 1968년에 제정된 국민 교육 헌장에 따라 새 국민상 창조에 역점을 두었다. 특히 1972년부터 시작된 새마을 운동이 교육 현장에도 반영되어 새마을 정신을 이해시키고 계몽시킴과 동시에 근로정신 함양, 자조 정신 배양에 힘썼다. 그리고 교육 유신 체제의 확립도 중점 교육 시책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가운데 1973년부터는 교육구청[북부와 서부]을 신설하여 교육 위원회의 하급 집행 기관으로 두었다.
1980년 제 5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7·30 교육 개혁이 발표되어 중등 교육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대학에서도 졸업 정원제 실시 등의 조치가 시행되었다. 1981년 당시 부산 교육의 중점 시책은 국민정신 교육의 강화, 기초 교육의 내실화, 과학·기술 교육의 진흥, 평생 교육의 기반 조성, 교육 여건의 개선 등이다.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는 2000년대의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이 기본 방향이 되었고, 이를 위해 과학·기술 교육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986년에는 초등학교가 196개 교, 중학교가 123개 교, 고등학교가 90개 교로 직할시 승격 당시보다 거의 3배가량 늘어났다. 특수 학교도 1974년에 부산혜성학교가 설립되었고, 부산농아학교와 부산구화학교, 혜성구화학교, 동암학교 등이 계속 신설되었다.
제5 공화국과 제6 공화국의 교체기인 1990년대의 부산 교육은 21세기를 대비하는 교육으로 방향을 잡고, 도덕성 함양과 창의성 계발을 강조하였다. 1991년에는 「지방 교육 자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됨으로써 광역 단위의 교육 자치가 실시되었고, 1995년에 들어서서는 민선 교육감이 선출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자치 시대가 열렸다. 각급 학교에서는 열린 교육과 평생 학습 시대를 위해 학습자 중심의 교육이 강조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 교육부가 ‘제2의 교육입국을 위해 지식 기반 사회가 요구하는 창의적 인재 양성’을 교육 정책 기본 방향으로 설정하였고, 주요 정책 사업에서도 인적 자원 개발의 필요성을 제기하였으며, 평가를 통한 경쟁 체제를 교육계에 본격적 도입하였다. 그리고 평생 교육과 다문화 교육이 대두되면서 교육의 방향과 중점이 바뀌게 되었다.
2016년 1월 현재, 부산광역시의 학교 수는 1,061개 교[유치원 415, 초등학교 308, 중학교 172, 일반계 고등학교 81, 특수목적 고등학교 14, 특성화 고등학교 35, 자율 고등학교 14, 특수 학교 15, 각종 학교 6[외국인 학교 5개 포함], 고등 기술 학교 1, ], 학급 수는 1만 6831개 학급[유치원 1,986, 초등학교 7,063, 중학교 3,394, 일반계 고등학교 2,280, 특수목적 고등학교 333, 특성화 고등학교 941, 자육 고등학교 380, 특수 학교 357, 각종 학교 83, 고등 기술 학교 14]이다.
학생 수는 40만 7561명[유치원 4만 5175, 초등학교 15만 4283, 중학교 9만 5020, 일반계 고등학교 6만 8119, 특수목적 고등학교 7,853, 특성화 고등학교 2만 2823, 자율 고등학교 1만 978, 특수 학교 1,870, 각종 학교 1,185, 고등 기술 학교 255], 교원 수는 3만 183명[유치원 3,478, 초등학교 1만 414, 중학교 6,673, 일반계 고등학교 4,991, 특수목적 고등학교 760, 특성화 고등학교 2,118, 자율 고등학교 850, 특수 학교 678, 각종 학교 189, 고등 기술 학교 32]이다. 평생 교육 시설 학교는 중학교가 4개 교, 고등학교가 7개 교이며, 학급 수는 중학교 29개 학급, 고등학교 161개 학급, 학생 수는 중학교가 1,144명, 고등학교가 6,100명이고, 고등학교 교원 수는 243명이다.
고등 교육 기관으로는 대학교가 부경대학교, 부산교육대학교, 부산대학교, 한국해양대학교, 경성대학교, 고신대학교, 동명대학교, 동서대학교, 동아대학교, 동의대학교, 부산외국어대학교, 부산가톨릭대학교, 신라대학교, 영산대학교, 인제대학교 등 15개 교이며, 전문 대학은 경남정보대학교, 대동대학교, 동부산대학교, 동의과학대학교, 동주대학교, 부산경상대학교, 부산여자대학교, 부산예술대학교, 부산과학기술대학교 등 9개 교이다. 평생 교육 기관은 173개소이며, 학원은 5,299개 원, 교습소는 5,270개소로 집계되었다.
[사회 교육]
사회 교육은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을 기회를 놓친 사람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는 기능과 사회 개선의 중요 수단으로 고려되는 기능, 그리고 평생 학습의 계속적인 과정으로서의 교육 기능이 있다. 예전에는 조직적이며 체계적인 교육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고 지역 특성에 따라 산발적인 활동이 있었을 따름이다. 이러한 사회 교육은 조선 시대에도 그것을 엿볼 수 있는데, 향약(鄕約)과 동래기영회가 그것이다.
부산의 경우 처음에 면(面) 단위, 뒤에 리(里), 동(洞) 단위의 향약을 만들어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모여 포상 또는 징계를 하였다. 동래기영회는 향약과는 조금 다르지만 동래 지방에서 170여 년 전부터 조직되어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다. 이것은 사회 교화와 상부상조의 기능을 가지고 사회 교육을 활발히 전개하여 왔다.
동래기영회는 동래 관아에 근무하다가 퇴임한 사람들이 지역 사회 개발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만든 것인데, 자체 기금을 축적하여 동래에 삼락학교와 동명학교 등을 설립·운영하고, 또 동래 지방의 여러 학교를 보조하는 등 육영 사업에 힘썼다. 그리고 송공단(宋公壇)의 제사와 유지 관리 등으로 주민들의 애국정신을 기르는 데에도 이바지하였다. 또 두구동 임석 마을 청년회가 있는데, 금정구 두구동 임석 마을에 지역 공동체의 상호 부조 및 교화 기능적 기층 조직이 만들어졌다. 이 조직은 마을 내부의 기풍을 자주적으로 선도하고, 효행이 지극하고 품행이 바른 청소년에게 상을 주기도 하였다.
3·1 운동 이후 부산에도 각종의 청년회가 만들어졌다. 부산진청년회와 초량청년회, 수정청년회, 서부청년회[대신동], 영도청년회 등이 결성되어 항일 운동 세력의 구축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여 문맹 퇴치를 위한 야학 운동도 전개하였다. 또 이러한 청년 운동을 총독부가 탄압하기 시작하자, 한국인 청년들은 이에 맞서 청년회 연합체격인 조선총동맹을 조직하였다. 이에 부산청년동맹이 결성되어 집행 위원에 최천택, 심두섭, 노상곤 등 8명이 활동하였다. 이러한 청년회는 대부분 문맹 퇴치 운동이나 야학 운동, 그리고 강연회 등을 추진하였다.
야학 운동은 1907년에 동래 부윤 김교헌(金敎獻) 아들이 설립한 동래야학이 시초였으며, 이를 전후하여 부산의 여러 곳에서 야학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3·1 만세 운동 이후 문화 계몽 운동과 대중 운동 확산에 따라 100여 개 이상의 야학회가 운영되었다. 또한 3·1 운동 이후 육영 사업에 힘을 쏟아 부산의 백산상회가 중심이 되어 기미육영회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8·15 광복은 사회 교육적 측면에서도 전환기였다. 일제하에서 교육의 기회가 철저하게 박탈되어 당시 국민의 78%가 문맹 수준이었다. 이에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에서 1947년에 국문 강습소를 열어 3,376회 개강으로 31만 7792명을 수강시켜 문맹 퇴치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당국의 활동 이외에도 부산의 곳곳에서 민간단체들이 자발적으로 문맹 퇴치 교육 활동을 벌였는데, 그 한 예로 부산부인회가 있다. 부산부인회는 1946년 4월 4일에 초량야학원(草梁夜學院)을 개설하여 초량의 태고사(太古寺)에서 문맹 퇴치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문맹자뿐 아니라 교육받은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한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여 바로 쓰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글전용촉진회 경남지회가 월요 한글 강좌를 개설하여 한글 바로 쓰기를 보급하였다. 월요 한글 강좌는 1949년 11월 28일부터 매주 일요일에 동광동 소재 시립 도서관에서 개설되었으며, 김계원과 정신득이 강사가 되어 무료로 강의하였다.
국어 계몽 활동도 한편에서 일어났다. 1945년 9월에 이형우, 박지흥 등이 수정동의 전 동아중학교 자리에 있던 공생원유치원을 빌려 학생문화동지회를 조직하여 한글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그해 10월에 경상남도 학무과가 최현배를 강사로 초빙하여 경남여자고등학교에서 시내와 경상남도 내의 초등·중등 교사를 대상으로 7일간 국어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중등학교 국어 교사들은 같은 해 겨울에 중등학교 국어교육연구회를 조직하여 매주 또는 매월 각 학교를 순회하면서 연구 수업과 토론회를 가져 국어 교육 발전에 기여하였다.
한얼몯음은 옛 초량상업학교 교사를 빌려 사무소를 차리고 수산전문학교 교수들의 지원을 받아 배달학원이라는 야간 중학교를 설치하였다. 1946년에 한얼몯음은 발전적 해체를 하고 영남국어학회로 개편하였다. 1948년에는 국학원이 발족되어 허웅과 나진석 등이 국어학 발전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중요한 공민학교와 고등 공민학교 교육이 실시되었다. 일제하에서는 교육의 기회가 억제되고 박탈되었으나, 광복 후에는 배움의 기회가 만인에게 개방되어 조국 해방의 기쁨과 함께 학교 취학 지원자가 격증하였다. 해외에서 돌아온 귀환 동포의 자녀들도 날로 불어나 기존의 학교 시설과 교원만으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령(學齡)을 초과한 아동들의 교육을 위한 공민학교 설치 요령이 1946년 5월에 제정되었다. 공민학교 설치 요령에 따르면, 대상 아동에게 단기간에 기초 교육을 실시하기 위하여 공민학교에 소년과와 성년과, 보수과를 두었고, 소년과는 13세 이상의 미취학자가 입학할 수 있었으며, 수업 연한은 2~3년이었고, 교과목은 공민, 국어, 국사, 지리, 산수, 이과, 음악 등 당시의 국민학교 과정과 같았다.
성년과는 국민학교에 취학하지 못한 18세 이상의 사람이 입학할 수 있었으며, 수업 연한은 1~2년이었고, 주로 공민과 국어, 산수를 지도하였다. 보수과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13세 이상의 사람이 입학할 수 있었으며, 수업 연한은 1년이었고, 교과목은 공민과 국어, 국사였다. 공민학교에서의 교육은 1950~1960년대의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빈곤, 전란 등이 겹쳐 생활이 어렵던 때에 교육 기회를 잃은 아동과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부산 지역을 포함한 우리나라 교육에 기여한 공적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민학교의 운영난과 의무 교육의 확대로 초등 교육이 보편화되면서 공민학교의 수는 1970년대에 들어 빠른 속도로 감소하였다. 1976년에 이르러 사실상 공민학교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고등 공민학교는 공민학교의 보수과를 개편하여 개칭한 것이다. 고등 공민학교는 1948년 1월 31일에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수업 연한은 1년 이상 3년이며, 교과는 중학교에 준하였고, 매 학교당 4개 학급 이하, 1학급당 50명 이하의 학생을 수용하도록 하였다. 본래 고등 공민학교의 취지는 성인 교육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는데, 후에 중등학교 지원자에 비하여 학교 수가 못 미치자 중등 과정의 보완적·구제적 학교로 변모하였다. 부산은 고등 공민학교가 사립으로 운영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이 제도도 학생 수의 감소와 고등 공민학교의 일반 학교로의 전환으로 1995년에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1950년을 전후로 생활에 직접 필요한 각종 직업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익히기 위한 기술 학교와 고등 기술 학교가 만들어졌다. 수업 연한은 그 종류와 내용에 따라 1년 내지 3년으로 하고, 입학 자격은 기술 학교의 경우 초등학교나 공민학교를 졸업한 자, 또는 등등 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인정되는 자라야 하며, 고등 기술 학교의 경우는 3년제로서 기술 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한 자, 또는 등등 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인정되는 자로 되어 있다.
1950년에 전국에 1개 교에 불과하던 기술 학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1959년에는 부산에만 경남자동차기술학교, 대한조선기술학교가 있었고, 고등 기술 학교로는 대한조선고등기술학교, 부산상선고등기술학교, 대한군경원호기술학교, 부산여자기술학교, 한국여자기술학교, 국제여자기술학교가 있었다. 1977년에는 기술 학교 재학생 수가 2만 2426명으로 대폭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 제도도 학생 수의 감소와 일반 학교의 개편으로 축소되었으며, 1980년대에 들어서서는 대부분 고등 기술 학교나 전문계 학교로 전환되었다. 부산 지역의 고등 기술 학교로는 2013년 1월 현재, 한국고등기술학교를 개칭한 부산국제영화고등학교가 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공민학교와 기술 학교가 감소 또는 폐지된 반면에 산업체 부설 학교와 특별 학급, 방송 통신 고등학교와 방송 통신 대학 및 개방 대학 등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 4월 7일에는 「독학에 의한 학위 취득에 관한 법률」이 제정·공포되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개인적인 사정과 형편으로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국가가 정한 소정의 시험에 합격하면 학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길이 제도적으로 마련되었다.
[특수 교육]
부산 지역에서 장애아를 위한 특수 교육이 처음으로 실시된 것은 6·25 전쟁으로 국립서울맹아학교가 제주도로 피란하였다가 1951년에 부산으로 옮겨 와서 대신동 구덕산 기슭에서 노천 수업을 하면서부터이다. 그때 임시 교사를 서구 암남동에 마련하면서 부산에 특수 학교가 설립된 것이다.
국립서울맹아학교가 1953년 휴전 직후 서울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을 때 함께 가지 못한 부산·경상남도 지역의 맹아·농아 학생들을 위한 부산 분교 설치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에 대한 찬반양론이 치열하였으나, 유병온(兪炳溫)과 안영환 두 교사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953년에 부산에 분교가 설치되었다. 1961년 5월 15일에 유병온은 지방 농아 학생의 취학 편의와 불우 농아 학생의 수용을 위하여 학교 인접지에 외원으로 성덕원을 설립하였다. 성덕원은 경상남도 지방의 농아 학생을 90명가량 수용하고 무료 급식과 교육 기회를 제공하다가 재정난으로 1970년에 폐쇄하였다.
또 1963년에 부산에서는 방문 교육(訪問敎育)이라는 독특한 장애아 교육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실시되었는데, 1960년대의 사회적인 배경으로 보아 매우 진보적인 시도로 평가되고 있으며, 한국 특수 교육사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이는 5·16 군사 정변으로 교육 자치제가 중단되고 교육 행정이 일반 행정 기구에 통합되어 있을 때, 당시의 군인 시장 김현옥이 복지 정책의 일환으로 지체가 부자유로와 국민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가정에서 지내고 있는 아이들을 찾아가서 교육한다는 방침에 따라 부산시 교육국에서 이를 구체화한 것이었다.
1970년대는 부산 지역의 특수 교육이 크게 진흥한 시기이다. 가장 두드러진 사실은 1974년에 부산직할시 교육위원회에서 정신 박약아와 지체 부자유아를 위한 공립 특수 학교 기관인 부산혜성학교를 설립, 개교하였다는 것이다. 1970년 5월에 남구 대연동에서 부산구화학교가 개교하였고, 1972년 7월에는 강서구 대저동에서 농아를 위한 혜성구화학교가 개교하였다. 1975년에는 부산맹아학교가 부산맹학교와 부산농아학교로 분리되었고, 부산맹학교와 부산농아학교에 고등학교 과정이 설치되었다. 1981년에는 정신 박약아와 지체 부자유아를 위한 동암학교가 연제구 연산동에서 설립되었고, 1984년에는 부산구화학교에 농아의 조기 교육을 위한 유치부가 병설되었다.
한편 부산직할시 교육위원회는 1973년에 일반 국민학교에 재학 중인 교육 가능급 정신 박약아를 위해 중앙국민학교에 특수 학급[1학급]을 처음 설치하였고, 이듬해에 부산진국민학교에 특수 학급[1학급]을 설치한 이후 1980년부터 기존의 방문 교육을 특수 학급으로 바꾸어 정규 교육을 실시하였다. 중학교에도 처음으로 3개 교[동평중학교·부산남중학교·내성중학교]에 1개 학급씩 특수 학급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특수 학급은 연차적으로 증설되어 1986년에 국민학교에 145개 학급, 중학교에 34개 학급이 설치되었다.
이후 연차적으로 장애 영역에 맞는 교육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지체 부자유아를 위한 부산혜남학교, 농아를 위한 부산배화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또 장애인 복지 시설에 수용된 중증 장애아를 교육하기 위하여 1980년부터 복지 시설 내 특수 학급을 설치하였는데, 천성재활원[1980년], 신애재활원[1980년]을 시초로 천마재활원[1993년], 영광원[1993년], 선아원[1995년], 실로암의 집[1997년], 아이들의 집[1997년] 등이 설립되었다. 또 이들 중증 장애아를 위한 방문 교육도 1990년부터 실시되었다.
장애아를 위한 직업 교육도 실시되었다. 1996년에 부산혜성학교가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의 지원으로 직업 훈련 실시 기관으로 지정받아 1년 과정의 전공과 3학급을 설치함으로써 직업 교육을 심화할 수 있게 되었다. 2000년도 들어와서 부산의 특수 교육은 특수 교육 대상의 교육 기회 확대와 함께 질적 성장을 가져왔다. 정신 지체와 지체 부자유 장애 영역으로 부산혜송학교 등 여러 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로써 특수 학교의 지역 안배와 과정별 균형이 이루어져 장애 특성에 맞는 양질의 교육이 용이하게 되었다.
부산의 특수 교육이 추구하는 기본 방향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교육 복지 사회 구현, 장애 유형·장애 정도를 고려한 맞춤형 서비스로 교육 수요자가 만족하는 특수 교육 지원 체제 구축에 따라 유아 특수 교육의 기회 확대, 특수 교육 보조원 확대 배치, 특수 교육 지원 센터 설치·운영의 활성화, 병원 학교 운영 등 건강·장애 학생 교육 지원, 순회 교육의 내실화, 특수 교육 환경 개선, 특수 교육 기관의 종일반 및 방과 후 학교 운영, 행정·재정 지원 확대 등으로,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특수 교육 지원 체제 구축 및 지원 확대를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2001년부터 지역별 특수 학교 및 초등학교를 거점 학교로 한 지역 교육청별 특수 교육 지원 센터를 운영하였고, 특히 2007년에는 부산광역시 차원의 부산특수교육지원센터를 개설·운영함으로써 특수 교육 지원 체제가 더욱 확고하고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만 3~5세의 특수 교육 대상 장애 유아의 완전한 무상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장애 유아 가정의 생활 및 교육 복지 증진을 위한 장애 유아 대상 특수 학교를 설치하였다. 1998년 은애학교의 설립을 시작으로 부산천사의 학교[2001년], 부산두레학교[2004년]가 설립되었으며, 각 학교에 병설 유치원이 설치되었다.
또한 소아암이나 백혈병 등 만성 질환으로 인한 장기 치료를 받은 건강 장애 학생들의 학습 결손 등을 예방하여 학업 연속성 유지 및 학습권을 보장하며, 개별화된 학습 지원, 심리·정서적 지원 등을 통해 학교생활 적응을 도모하고, 삶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심어 주어 치료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전국에서 최초로 병원 학교를 설치하였다. 현재 부산대학교 병원학교[2004년, 부산혜송학교 유치부 소속], 동아대학교 병원학교[2005년, 부산혜송학교 초등부 소속], 인제대학교 부산백병원학교[2005년, 부산혜남학교 초등부 소속]를 운영하고 있다.
직업 교육은 고등부 과정과 연계하여 부산혜성학교를 시작으로 부산맹학교와 부산혜남학교에 설치하여 장애인의 자립과 실질적인 직업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그리고 2013년에 더 많은 학교 설립과 지원을 통하여 장애 학생에 대한 적극적 지원을 하도록 하고 있다.
[평생 교육]
평생 교육은 태아에서 무덤까지 계속되는 교육으로, 한 개인의 생존 기간 전체에 걸쳐 이루어지는 교육을 수직적으로 통합하고, 가정·학교·직장·도서관 등 모든 기관과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을 수평적으로 통합하여 ‘인간 삶의 질을 높이고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는 바람직한 사회 발전을 추구하는 교육’으로 정의하고 있다.
평생 교육 정책 성립의 근간은 궁극적으로 「평생 교육법」의 제정에 있다. 그동안 체계적인 법적·제도적 개념이 정립되지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평생 교육은 1999년 8월 31일에 「평생 교육법」이 제정·공포됨에 따라 종래의 가정 교육이나 학교 교육의 보완 측면에서가 아닌 생애 교육, 학습자의 개별 학습 활동이나 실용주의적 문제 해결 중심의 평생 교육으로 그 체제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평생 교육의 진흥을 국가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 및 「교육 기본법」에 따라 「평생 교육법」과 「평생 교육법 시행령」[2000. 3. 13] 및 「평생 교육법 시행 규칙」[2000. 3. 31]이 제정·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부산광역시에서는 2000년 7월에 부산 평생 교육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부산 지역 평생 교육 정보 센터로 부산광역시립도서관이 지정되었다. 부산광역시립도서관은 지역 주민을 위한 평생 교육 프로그램 개발 및 운영과 평생 교육 종사자에 대한 연수 및 연구, 정보 수집 및 제공, 시·군·구 평생 학습관 지정 및 운영, 평생 학습 상담 기능과 평생 교육 기관 간 네트워크 구축, 평생 교육 관련 자료집 발간·배부 등 지역의 평생 교육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2000년부터 부산광역시의 시립 도서관 10개[부산시민도서관 제외]에서 1개소 이상의 평생 마을을 운영하도록 하여, 부산광역시립중앙도서관 3개소, 연산도서관 2개소, 나머지 도서관은 1개소씩 총 13개를 운영하였다. 그리고 부산광역시 교육청에서 소규모 도서관을 운영하다가 시민 도서관으로 이관한 것이 쌈지 도서관으로 총 28개소였다. 2002년에는 부산광역시를 비롯한 전국 7개 지역에서 단일 기관이 아닌 대학과 연계하여 지역 평생 교육 정보 센터 지정을 받았는데, 부산광역시립시민도서관의 경우 부산대학교 부설 평생교육원과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재지정받았다.
2004년 3월 19일에 전국 최초로 부산 지역 학부모들의 자기 계발 및 자아실현, 학습 욕구 충족 및 성장·발전을 목적으로 하는 동래학부모교육원을 부산 지역 평생 교육 정보 센터 건물 내에서 개원하였다. 이후 2007년까지 부산 지역 4개 권역별로 학부모 교육원이 개원되어 자녀 교육 방법과 학부모 가르치미 양성 등 학부모 인적 자원 개발과 교육 자원 봉사 활동을 전개하여 평생 학습 사회 구현에 이바지하고 있다.
한편 2002년 해운대구, 2006년 연제구, 2007년 사상구 등 3개 기초 자치 단체가 평생 학습 도시로 지정됨에 따라 자치구 차원의 평생 학습에 대한 관심 제고 및 투자 확대, 주민들의 평생 학습 참여 기회 확대 및 관심을 제고하였다. 특히 2005년에는 해운대구와 공동으로 전국 평생 학습 축제를 유치하여 부산 지역 평생 학습 문화 조성 및 활성화에 기여하였다. 또한 평생 마을과 쌈지 도서관이 통합되어 2011년에 「작은 도서관 진흥법」에 의하여 작은 도서관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후 문화관광부가 부산광역시의 자치구·군으로 이관한 것이 24개소, 부산광역시 자치구·군에서 자체 개소한 작은 도서관이 3개소, 사립 작은 도서관이 128개소로, 2012년 6월 30일 현재 부산광역시에는 206개의 작은 도서관이 운영되고 있다.
부산광역시와 부산광역시 교육청이 중심이 되어 추진하고 있는 2012년 평생 교육 중점 추진 사업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평생 교육 진흥, 사회 통합을 위한 평생 학습 참여·연계 강화, 생애 단계별 맞춤형 평생 교육 활성화 등 3대 정책 영역으로 설정하여 추진하고 있다.
[유아 교육]
부산 지역에는 1936년 기준 일본인이 설립하여 일본인 자녀가 다니는 유치원이 공립 1개 원, 사립 7개 원으로 모두 8개 원이 있었고, 한국인의 유치원은 사립일신유치원을 비롯하여 모두 4개 원이 있었다. 광복 후 1949년에 「유치원법」이 제정·공포되었지만 1950년 6·25 전쟁으로 정착되지 못하였다. 1952년에는 유치원의 설립 인가, 폐지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1951년에 피란민으로 유아가 증가되어 유치원이 상당수 생겨났는데, 당시 유치원의 총수가 14개였다는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부산의 대표적인 공립 유치원은 부산유치원이다. 부산유치원은 일본인이 설립하여 운영하였던 부산공립유치원을 경상남도에서 인수하여 1946년 7월 1일자로 이동희를 원장으로 하여 부산 지역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을 위한 공립 유치원으로 문을 열게 되었다. 유치원이 증설되자 이를 조직화하기 위하여 1947년 4월 20일에 경상남도 유치원연합회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1948년 4월에 부산시립유치원 안에 부산보육전문학원을 설립되었는데, 부산유치원장인 이동희가 1948년부터 추진하여 1950년에 인가를 얻어 유치원 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1950년에 전쟁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1962년 8월에 「유치원 시설 기준령」이 제정되어 한동안 무질서하게 설치·운영되어 오던 유치원 교육에 대한 법적인 기준이 마련되었다. 1969년 2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유치원 교육 과정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유아 교육은 주로 대도시의 상류층 자녀들에게 국한된 조기 재능 교육의 일환에 지나지 않았다. 1970년대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우리나라는 복지 국가의 실현을 적극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제5 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유아 교육이 강화되었으며, 1963년에 직할시로 승격한 부산은 유아 교육의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다.
1974년에 부산직할시 교육위원회에서 처음으로 유치원 교육 육성 방안을 마련하여, 유치원의 운영 쇄신과 아울러 유치원에 대한 조직적인 장학 지도와 시범 발표회를 매월 개최하여 획기적인 발전을 도모하였다. 특이한 사항은 광복 이전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부산유치원이 광복 후 공립으로, 1950년대에는 사립으로 전환된 뒤 부산의 유아 교육은 줄곧 사립에만 의존하여 왔다. 이런 상황에서 1975년 3월에 성지국민학교에 병설 공립 유치원이 설립되었고, 이후 1981년에 구덕국민학교에 다시 공립 유치원이 병설되었다. 인구 이동과 가족계획에 따라 부산 중심지를 벗어난 지역의 국민학교에 시설의 여유가 생기면서 유치원을 병설하는 경우가 많이 생긴 것이었다.
1980년대에는 조기 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1982년에 「유아 교육 진흥법」이 제정되었고, 이에 따라 부산직할시 교육위원회에도 1983년 9월 1일부터 초등 교육과에 유아 교육 담당 장학관과 장학사가 배치되었다. 이 시기의 특징적인 현상은 첫째, 교육 과정 운영의 기초가 정립되어 갔으며, 둘째, 국민학교 교육 과정과의 연계성 문제가 진지하게 검토되었고, 셋째, 유치원의 시범·연구 발표회 등을 통한 활발한 정보 교환과 유치원 상호 간의 자율적인 연수 활동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었으며, 넷째, 선진 외국의 새로운 지도 방법이 활발히 도입되었으며 교재 교구가 체계적으로 개발되었고, 다섯째, 국민학교와의 협조 체제 형성, 지구 장학 협의회 운영 등 조직적인 방법으로 장학 지도의 효율화를 기하였다는 점이다.
1990년대는 부산의 유아 교육이 전국적인 수준으로 급격한 질적인 향상을 가져온 시기였다. 1990년 3월에 4개 지역 교육청에 유아 교육계가 신설되어 초등 교육계의 장학사 1명이 유아 교육을 겸직 담당하던 것을 유아 교육 계장 1명, 일반직 1명을 배치하여 폭주하는 유아 교육 업무를 전담하도록 하였다. 이 시기에 특기할 것은, 지금까지는 유치원의 교원 연수를 한국어린이육영회 부설 유치원교원연수원에서 실시하였으나, 1987년부터는 부산시 공립·사립 유치원 교사의 연수를 초등·중등 교원과 함께 부산광역시 교육 연수원에서 주관하였으며, 1995년부터는 원감 자격 연수도 부산광역시 교육 연수원에서 주관하여 연수의 효율화를 기하는 동시에 유치원 교원으로서의 자긍심을 갖도록 하였다.
또 1997년부터는 유아 특수 교육 대상자를 위한 특수 교육 프로그램 운영 기반을 조성하여 1998년 3월 1일에 유아 특수 교육 프로그램을 위한 공립 유치원 3개 원, 사립 유치원 1개원을 개설하였으며, 이들 유치원의 8개 학급에서 53명의 유아를 교육하고 있다.
2000년대 「유아 교육법」의 제정과 저출산 고령화의 급격한 진행은 유아 교육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또 부산광역시의 초등·중등 교육에서 강조하는 독서 교육을 유아 교육 단계에 연계하여 유아 발달에 적합한 독서 교육 활성화를 위한 시책도 실시하였다. 2005년에 잠들기 전 동화책 읽어 주기 캠페인을 시작으로 2006년도에는 지역 주민과 함께하는 유아 전용 도서관을 설치 운영하였다. 2007년에는 유아 교육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부산유아원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노력과 그에 따른 정책은 다양한 효과를 발휘하여 유아 교육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