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7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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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統一新羅時代 |
영어의미역 | Unified Silla Dynast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한정훈 |
[정의]
7세기 중엽 신라 통일부터 10세기 초반 멸망 때까지 부산의 역사.
[개설]
삼국을 통일한 676년 이후부터 멸망할 때까지 부산의 행정 조직과 통치 구조, 사상과 신앙 활동, 대외 교류, 문화 및 명소 등에 살펴본다.
[행정 조직과 통치 구조]
오늘날 부산 지역은 통일 신라 시대 신문왕 대에 삽량주[양산] 소속의 거칠산군(居柒山郡)으로, 대증현(大甑縣)과 갑화량곡현(甲火良谷縣)이라는 두 개의 현을 영속한 행정 구역이었다. 757년(경덕왕 16) 전면적으로 지방 제도를 정비하여 주와 군현의 명칭을 한자식으로 개명하고 9주를 중심으로 하는 관할 군현 수를 조정하면서 거칠산군을 동래군으로, 대증현을 동평현으로, 갑화량곡현을 기장현으로 각각 개명하였다. 중앙 정부에서 동래군을 설치한 목적은 해안 방어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왕경의 배후 지역으로서 부산 지역의 역할을 중시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특수 행정 구역인 부곡(部曲)도 존재하였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는 형변(兄邊)은 해신에게 지내는 국가적 제사가 거행되는 중사(中祀)인데, 이곳에는 제사를 준비하는 특정한 의무를 부담하는 형변 부곡이 존재하였을 것이다. 또한 명마를 사육한 절영도의 경우를 참고하면,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 확인되는 ‘고지도거(古智島阹)’와 같은 말 목장지가 고지도 부곡으로 존재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오늘날과 같이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의 명소인 해운대와 신선대의 유래는 반신라적 지식인인 최치원(崔致遠)과 관련이 깊다. 이러한 통일 신라 시대 부산의 반신라적 정서는 후삼국 시기 반고려적 정서로 연결된다. 이러한 부산 지역 토호 세력의 정치적 성향은 견훤(甄萱)과 왕건(王建)의 대결 속에서 견훤이 왕건에게 절영도의 명마 1필을 왕건에게 바쳤다는 기록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치적 향배 속에 고려 건국 시기에 부산 지역에서 유력한 호족 세력의 존재는 보이지 않고 동래 정씨(東萊鄭氏) 같은 지방 호장층만이 확인된다. 또한 이러한 정치적 성향은 고려 시대 부산 지역이 속현(屬縣)의 지위로 전락하는 것과도 일정한 관련성이 있다.
동래군의 영현과 각 촌락은 중앙에서 파견된 태수 등의 지방관을 통해 중앙 정부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았다. 동래군 태수는 동평현과 기장현을 양 날개로 동남방의 군사적 방어를 주요 업무로 삼았다. 동래군은 군(郡) 치소를 중심으로 아래에는 몇 개의 직속 촌이 있었고, 영현이던 동평현과 기장현도 몇 개의 촌락으로 구성되었다. 태수와 외사정 및 군리(郡吏)로 구성된 군사(郡司)를 중심으로 군의 행정에 대한 전반적인 계획을 세우고, 그 아래의 직속 촌이나 영현의 현령에게 그 명령을 하달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하나의 현이 9~10개의 촌으로 구성되고, 보통 한 현에 인구수는 900~1,000명이었다는 연구 성과에 따르면, 동래군은 16개 정도 촌락, 동평현은 4~6개 촌락 그리고 기장현은 10개 내외 촌락으로 각각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촌주(村主)가 있는 행정촌을 중심으로 각 촌락의 행정 업무가 이루어졌고, 현령은 행정의 가장 기초 단위인 각 촌사(村司)를 통해 개별 촌에 대해 파악하였을 것이다. 동래군의 영역은 오늘날의 동래구·금정구·해운대구·수영구·남구·연제구 정도이고, 동평현은 부산진구·중구·서구·동구·영도구·사상구·사하구·북구 등이며, 기장현은 오늘날의 기장군일 것이다.
[사상과 신앙 활동]
통일 신라 시대 사상계의 핵심은 불교이다. 당시 부산 지역의 불교계는 강서구 녹산 일대의 가야 불교, 기장군 일대의 원효(元曉) 계통, 범어사 일대의 의상(義湘) 계열, 신라 말 만덕사[지]를 중심으로 한 선(禪) 사상으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삼국유사(三國遺事)』 금관성 파사 석탑조에 나오는 허황옥 설화와 관련하여 가락 지역이 한반도의 불교 수용에서 상당히 중요한 지역일 가능성을 제기한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향후 논의가 더 필요한 부분이지만, 가락 불교의 전통이 통일 신라 시대에 현재의 부산 강서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기장 지역을 중심으로 전파된 원효 사상은 문무왕 대에 진골 귀족 세력을 배제하고 관료 체제를 구축해 나가면서 점차 지방에 대한 직접적 통치 체제를 실현하고자 한 통일 정책과도 관련이 있다. 기장 지역에 위치한 4대 사찰[선여사·취정사·안적사·장안사]은 모두 원효가 창건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든 중생이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는 원효 사상은 차별받는 지방민 또는 피지배층에게 불교를 통해 극락으로 가는 진정한 해탈의 방법을 통해 대민(對民) 장악 방식으로 활용되면서 부산 지역에 전파되었을 것이다.
부산의 대표적인 사찰인 범어사는 의상 사상과 관련이 깊다. 범어사가 문무왕 대에 창건되어 흥덕왕 대에 중창된 것은 화엄종이 지방 사회로 확산·성장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의상은 지위와 신분이라는 세속적인 위계질서를 벗어나 불법 앞에서의 평등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이 점이 기왕에 소외되었던 지방과 일반민에게 상대적으로 더 많은 관심을 촉구하는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범어사는 신라 변경 지대에 의상이 창건한 화엄 10찰 중 하나이다.
신라 말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오늘날의 만덕사[지]는 신라 말엽 진해만 연안을 통해 들어와 창원·진례·김해를 중심으로 유행한 선문(禪門)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향후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창원의 봉림사지와 성주사가 각각 당시 유입된 선 사상에 의해 건립된 봉림산문과 성주산문이라는 점에서 어떤 연관성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러하다면 선종의 유행과 함께 해무리굽 청자라 칭하는 초기 청자의 제작과 차(茶) 문화 등이 낙동강 하구를 통해 경상도 지역으로 파급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선진 문물이 경상도 지역으로 전파되는 주요 경로 중 하나로 남해안~낙동강 하류를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부산 지역의 신앙생활은 남해신[남해 용신]에 대한 제의를 들 수 있다. 신라 시대 때부터 중사로 해신에게 제의를 베풀던 제장(祭場)이 동래군 남쪽 해안가의 형변에 있었다. 그리고 고대에 지방민의 곰에 대한 신앙심은 기장의 달음산 주변에서 확인되고 있다. 용신(龍神)과 관련되는 기우제의 경우는 금정산 동쪽에 있는 번우암이나 승악산, 고지도 신사, 용추에서 지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외에 명마의 산지로 유명한 절영도에 위치한 절영도 신사는 말의 생육과 질병 예방 및 퇴치를 기원하는 마제(馬祭)의 거행 장소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동평현 남쪽 약 400m[1리]에 위치한 모등변 신사는 어떠한 신위(神位)를 모셨는지 알 수 없다.
[대외 교류]
통일 신라 시대는 대당(對唐) 관계보다는 상대적으로 대일(對日) 관계가 더 적극성을 띤 시기이다. 신라와 당·일본의 교류는 공무역이 우선이지만 관계가 그리 활발하지 않았던 시기인 만큼 경제적 목적을 위한 민간 무역이 활발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부산 지역은 해안의 입지적 조건을 이용하여 중국 및 일본과의 무역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대당 수출품은 비단 같은 고급 견직물류, 금은 세공품, 해표피 등의 짐승 가죽과 우황·인삼 등의 약재 그리고 과하마(果下馬)·소마(小馬)·말·개 등과 같은 짐승을 들 수 있다. 특히 부산은 말과 관련이 깊은데, 절영도가 통일 신라의 대표적인 명마의 생산지였을 뿐 아니라 이러한 명마가 진골 귀족과 왕에게 선물로 이용된 사실이 참고 된다. 따라서 말의 생산지였던 부산은 8~9세기 직접 대외 교류에 참여하기보다는 국가 혹은 왕실을 통해 간접적으로 대외 교류에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 말에 부산 지역이 대외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한 계기는 청해진의 장보고 집단의 약화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상황 변화는 금주[김해], 강주[진주], 울산 등지가 남해안의 새로운 대외 교류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하였다. 부산이 이들 거점 교역 도시를 잇는 남해안의 연해 교역로상에 위치하는 만큼, 동래 정씨 같은 고려 초 부산의 토호 세력이 말[馬]과 같은 지역의 특산물을 교역의 대상으로 삼아 대외 교역 활동에 참여하였을 것이다.
[문화 및 명소]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의 문화는 특별히 남아 있지 않지만, 문헌을 통해 이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몇 가지 살펴볼 수 있다. 동래군의 북쪽에 있는 온정(溫井)의 물은 달걀을 익힐 수 있을 정도로 뜨거우며, 아픈 사람이 목욕을 하면 곧 치유되어 신라 왕들이 여러 차례 이곳을 다녀갔다. 대표적으로 683년(신문왕 3) 신라의 재상 충원공이 동래 온정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간 기록이 전한다.
또한 영도 태종대의 유래도 신라 왕들이 부산 지역에 행차했음을 알려 준다. 태종대는 태종 무열왕이 활을 쏘던 장소이다. 왕경 경주와 떨어진 부산 지방에 국가 중흥의 기틀을 다진 군주가 활을 쏘면서 비범한 능력을 길렀다는 것이 지방민에게는 다시없는 자랑거리이며, 지방민과 통치자의 일체감의 표시로서 중앙 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정신적 토양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태종대가 위치한 영도는 일찍부터 말을 기르는 목마장으로 활용되었다. 성덕왕은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룬 김유신(金庾信)의 손자 대아찬 김윤중을 불러 할아버지의 업적을 이야기하면서 돌아갈 때 절영산 말[絶影産馬]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시기의 범어사를 비롯한 불교 사찰 및 최치원과 관련이 깊은 해운대·신선대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