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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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土器 |
영어의미역 | Pottery |
이칭/별칭 | 질그릇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 |
집필자 | 홍보식 |
[정의]
부산 지역에서 발견된 토기.
[개설]
흙을 빚어 만든 토기(土器)는 전 세계 각지에서 사용된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생활 용기의 하나로 인류 문화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토기는 1만 2000년 전인 후기 구석기 시대에 시베리아와 연해주, 중국의 황허[黃河]와 양쯔 강[揚子江](장강) 유역, 일본 열도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하였다.
점토는 500℃ 이상의 열을 가하면 점토 속에 있는 수분이 증발하여 흙 용기가 되는데, 점토에서 흙 용기로 되는 과정은 바탕흙의 선택과 반죽, 성형(成形)[형태 만들기], 문양·장식하기, 말리기, 굽기 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바탕흙의 기본 재료는 진흙이며, 여기에 석영·장석·운모가 혼입된 모래를 섞기도 한다. 물과 함께 반죽한 뒤 형태를 만드는데, 그것을 성형이라 한다.
성형은 도공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디자인을 점토로 표현하는 작업이다. 해당 시기의 토기의 종류는 성형에서 모두 결정되는 만큼, 토기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형태를 만들고 무늬를 새기거나 구멍을 뚫은 후 그늘에서 적당하게 말린다. 말린 토기는 가마에 넣고, 불을 지펴 구워 만든다.
토기의 종류로는 옹(甕)·발(鉢)·시루·항아리·항아리 받침대·굽다리 접시[高杯]·컵 모양 토기 등 매우 다양할 뿐만 아니라, 인간 생활의 진전에 따라 해당 시기에 사용되는 종류와 형태도 매우 다양하다. 선사 시대에는 토기의 질이 동일하고 발·옹 등 종류가 단순하였으나, 역사 시대가 되면서 질이 다른 토기가 생산되고 옹·완(盌)·호(壺)·바리·접시·시루·받침대·상형 토기(象形土器) 등 종류가 다양해진다. 질이 다르다는 것은 곧 토기의 바탕흙이 다름을 나타내며, 토기의 종류가 많아진다는 것은 토기의 기능이 분화하고 생활이 더욱 윤택해졌음을 나타낸다.
토기의 기능은 천차만별이지만, 대다수는 생활 토기나 제의용에 포함된다. 토기는 원래 의도된 기능에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여러 목적 또는 기능을 겸용하는 것도 있다. 또 본래의 기능을 벗어나서 다른 목적으로 사용된 것도 있다. 일상 토기는 운반용·저장용·가공용·조리용·식기·벼루·등잔 등으로 구분되고, 제의용 토기는 제례 의식용·공헌용·부장용·매장용으로 구분된다.
[변천]
부산 지역은 신석기 시대 초기부터 토기가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고, 시대에 따라 토기의 제작 기술과 질 및 종류 등이 발전하여 왔음이 그동안의 발굴 조사에서 확인되었다. 신석기 시대의 부산 동삼동 패총·영선동 조개더미, 범방동 유적, 수가리 유적, 가덕도 장항 유적, 금곡동 바위 그늘 유적[金谷洞巖蔭遺跡] 등에서 초기부터 말기의 빗살무늬 토기가 확인되었다.
신석기 시대의 토기는 융기문 토기→ 영선동식 토기→ 수가리식 토기→ 봉계리식 토기→ 율리식 토기로 변화되어 왔다. 신석기 시대의 토기 종류는 대부분 발이다.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면서 빗살무늬 토기가 사라지고 무늬가 거의 없는 민무늬 토기로 바뀐다.
부산 지역은 청동기 시대 유적이 많이 조사되지 않아 불분명한 부분이 많지만, 다른 영남 지역과 양상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근에 조사된 동래 온천동 유적과 온천천 시민 공원 내 유적에서 출토된 민무늬 토기로는 옹·바리·뚜껑·두형 토기(豆形土器) 등이 있고, 미음동 고인돌에서 적색 마연 토기(磨硏土器)가 출토되었다.
기원전 1세기 후반이 되면, 중국 한나라의 토기 기술이 수용되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질의 토기가 만들어지는데, 와질 토기(瓦質土器)가 그것이다. 와질 토기는 입자가 고운 점토를 사용하고 회전력을 이용하여 형태를 만든 후 천정이 있는 밀폐된 가마에서 구워 만든 토기로, 표면 색상이 회백색 또는 회흑색을 띤다. 꼰무늬[繩文] 또는 격자무늬[格字文]를 새긴 도구로 표면을 두드려 단단하게 하였다.
그리고 종래의 선사 시대의 토기 요소를 계승한 적색의 연질 토기(軟質土器)가 생산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는 주머니 모양 토기, 항아리, 바리, 시루, 뚜껑, 컵 모양 토기, 화로 모양 토기, 다리 달린 항아리 등 다양한 종류의 토기가 생산되었다.
삼한 시대의 부산 지역의 토기는 일상생활 용기로는 연질 토기가 많이 사용되었고, 제기 또는 공헌 용기로는 와질 토기가 사용되었다. 쇠뿔 모양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진한과 변한의 특징을 지닌 토기가 다수 출토되어 부산 지역의 진한과 변한이 토기 문화를 공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원후 3세기 후반 이후가 되면, 등요(登窯)[굴가마]에서 1,000℃ 이상의 고온에서 도질 토기(陶質土器)가 생산되면서 삼국 시대 토기 문화가 전개된다.
삼국 시대의 토기는 삼한 시대 후기의 기종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기종이 만들어지는데, 두 귀 달린 항아리·손잡이 달린 화로 모양 토기·굽다리 접시·항아리 받침대·접시·잔 등의 토기가 생산되었다. 4세기 전반부터 김해 지역의 토기와 형태 및 종류, 색상 등에서 거의 유사한 토기가 부장되어 금관가야의 한 부분이었음을 나타낸다. 5세기 전반 이후에는 신라 토기가 들어오면서 이전의 금관가야 양식의 토기가 사라지고 신라 양식 토기로 바뀌지만, 부산 지역의 토기 전통은 상당 기간 지속된다.
지금까지 출토된 부산 지역의 신석기·청동기 시대의 토기는 분묘 출토품과 주거지 및 조개더미 등 일상생활 유적에서 출토된 일상 용기가 대부분이지만, 삼한·삼국 시대의 토기는 조개더미 출토품을 제외하면, 대부분 무덤에 부장된 토기이다. 시대에 따라 사용된 토기의 성격이 다르지만, 토기는 변화가 가장 풍부하고 빠르기 때문에 토기의 변화를 통해 해당 시대 부산 지역의 문화 내용과 변천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