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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두리 나루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678
한자 出斗理-
영어의미역 Chuduri Ferry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1동
집필자 홍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나루터
관련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김해 지리지』
폐지 시기/일시 1933년 3월연표보기 - 구포 대교 개통으로 폐지
비정 지역 출두리 나루터 비정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1동

[정의]

부산광역시 대저 1동출두리와 구포를 연결하던 나루터.

[명칭 유래]

출두리 나루터와 연관된 지명의 유래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삼차수(三叉水)[세 갈래의 물길이라는 의미로 서낙동강을 일컫음]는 양산군에서 남쪽으로 40리[약 15.71㎞]에 있으니, 곧 황산강(黃山江)[낙동강의 옛 이름]의 하류이다.

예부터 이르기를 한충(韓沖)이 꿈에 하늘에서 비녀 세 개를 얻었는데, 깨어나 이 강에 와서 던지니 강물이 셋으로 나뉘어 한 갈래는 감동(甘同)[구포] 앞으로부터 소요도(所要島)의 동쪽으로 해서 바다에 들어갔고, 다른 한 갈래는 출두(出頭)의 동쪽으로부터 덕두도(德頭島)의 서쪽으로 해서 바다로 들어갔으며, 나머지 한 갈래는 대저도(大渚島)의 서쪽으로 해서 바다로 들어갔다[三叉水在郡南四十里乃黃山江之下流也古云韓沖夢得三叉於天上覺來投之於此江江水三分一泒自甘同前所要之東入海一泒自出頭之東德頭島之西入海一泒大渚島之西入海]”라고 하였다.

이상을 해설하면, 고려 예종 때 김해 도호부사로 와 있던 한충이 땅이 넓어서 다스리기가 어렵다고 왕에게 상주하였더니, 꿈에 비녀 세 개를 얻어 서낙동강에 던지자 강이 세 갈래로 나뉘었다는 전설이다. 즉, 출두리를 중심으로 동낙동강, 서낙동강이 갈라지고 다시 평천강으로 갈라져 바다에서 만나는 형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출두리라는 지명의 연원과 나루터의 존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형성 및 변천]

출두리 나루터는 이상과 같이 오랜 시간 동안 낙동강을 건너는 ‘강목’의 기능을 해 왔다. 특히 이곳 사람들은 금정산·백양산 등에서 구한 땔감을 이곳 나루터를 통해 실어 날랐다고 한다. 그러나 1933년 3월 구포 다리가 개통된 이후 나루터의 기능은 사라졌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출두리 나루터의 행정 구역상의 명칭은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 1동으로, 출두 당리 마을과 구포동의 강폭이 약 50m로 가장 좁은 곳이므로 이 지역 일대로 비정된다. 출두리 지역은 1856년(철종 7) 홍수 때 이곳 주민들이 팽나무 위로 피신하여 많은 인명을 구하였다고 하여 ‘활이정’이라는 정자가 세워질 만큼 적은 비에도 가옥과 전답이 침수되는 지역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 구포 다리 가설과 함께 추진된 낙동강 제방 축조로 이후 홍수 피해가 줄어들었고, 이로써 기존의 모래톱 사람들의 주거지가 제방 너머로 옮겨져 신촌·당리·번덕 등 3개 마을이 형성되었다. 또 이 일대는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1905년을 전후하여 일본인들이 집단 이주하여 농장을 짓고 조선인들의 농지를 수탈하였던 곳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이 지역에 배 과수원을 조성하였으며, 이를 통해 한때 ‘구포 배’ 주산지가 되었다.

[관련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김해 지리지』에 관련 기록이 실려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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