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5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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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儒敎 |
영어의미역 | Confucianism in the Joseon Dynasty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강식 |
[정의]
1392년에서 1910년까지 부산 지역에 나타난 유교 문화의 양상.
[개설]
1392년 조선 건국과 더불어 부산 지역에서도 유교가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부산 지역은 조선 초기에 뚜렷한 재지사족(在地士族)이 형성되지 않아 다른 지역보다 유교적인 교화와 유학의 보급이 뒤떨어진 곳이었다. 조선 초기 부산 지역에는 성리학의 보급을 위한 향교와 문묘(文廟)가 설립되었다. 성리학이 민간 신앙에 영향을 주면서 음사(陰祀)를 대신하여 사직단, 여단(廬壇), 산천단 등이 설립되어 유교식 제례가 시행되었다. 민간에서는 사례(四禮)를 시행하여 나갔다. 유교가 향촌 사회에 보급되면서 향약(鄕約)이 실시되고, 의리 명분론에 따른 충효의 이념이 정착되어 나갔다. 이에 많은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적의 침입에 순절하는 충신과 열사가 많이 나타났으며, 제단과 사묘(祠廟)가 많이 건립되었다.
[유교 문화의 전개 양상]
조선 시대에 부산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유교가 정착 시행되는 것과 궤를 같이 하면서 유교가 보급되어 나갔다. 이러한 양상은 대략 다음의 네 측면으로 나타났다.
1. 교육 기관 건립
유교의 보급을 위한 각종 교육 기관이 세워졌다. 조선 초기에 동래 향교와 기장 향교가 설립되고, 문묘가 세워져 석전례(釋奠禮)를 시행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열사를 추모하고, 숭고한 뜻을 계승하기 위해서 안락 서원이 1652년에 건립되었다. 이를 통하여 유교의 보급이 가능하였다.
2. 제단 설치
민간 신앙인 음사를 추방하고, 국가 제례를 보급하기 위한 제단이 설치되었다. 동래현의 오른쪽인 사직동에 사직단이 설치되고, 현의 동쪽 2리에 성황사, 현의 북쪽에 여단, 절영도 신사(絶影島神祠), 모등변 신사(毛等邊神祠), 고지도 신사(古智島神祠) 등를 비롯한 산천단이 설치되었다. 이를 통하여 성리학에 입각한 제례가 확립되어 나갔다.
3. 민간 표창
유교의 의리 명분론에 따라 충효 이념이 민간에 정착되어 나가면서 표창되었다. 성종 대에 김득인(金得仁)의 여묘(廬墓) 3년으로 정문(旌門)을 세우고 관직을 제수 받았으며, 읍리 옥석근(玉石根)의 아들 옥종손(玉宗孫)과 만호 김보문(金寶文)의 딸이 효도를 잘해 정문과 복호(復戶)를 받았다. 임진왜란 때는 일본군에 대항하다가 순절하는 충신과 열사가 많이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반송 삼절사의 양씨 3형제, 송상현·정발·윤흥신의 순절을 들 수 있다. 또 송상현의 첩 금섬(金蟾)과 정발의 첩 애향(愛香)에게도 현판이 내렸다.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 때 부산 지역의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워서 순절한 이들을 위하여 충렬사, 농주산 전망제단, 송공단, 정공단, 윤공단, 의용단 등이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돕기 위해 나왔던 명나라 장수들을 위하여 신무단과 만공단이 세워졌다. 이를 통하여 유교의 기본 사상인 충효가 민간에 정착되었다.
4. 향약 시행
유교적인 향촌 지배 체제의 확립과 대민 교화를 이루었다. 조선의 지배 세력인 양반들은 향안(鄕案)의 작성과 향촌 지배 기구였던 향교, 서원, 향청의 임원으로 활동함으로써 지역 사회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층부인 향민의 통제를 위해서는 향약의 시행이 필요하였다. 부산 지역에서는 향반(鄕班)들이 향민들을 지배하였다. 부산에서는 임진왜란 이전에 시행되던 향약이 중도에 폐지되고, 임진왜란 이후에 향약은 관 주도의 수령 향약으로서의 성격을 가졌다. 부산 지역의 사하면과 남천면의 향약이 시행되었으며, 동약(洞約)으로 확대되었다. 부산에서 실시된 향약의 조항에서는 충효와 상부상조 및 환난상휼이 강조되었다. 이를 통하여 향촌 사회의 안정과 대민 통제가 가능하였다. 한편 민간에서는 관혼상제의 사례를 유교식으로 시행하면서 생활 문화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