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4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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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旌閭 |
영어의미역 | Awading Filial/Chaste People or Loyal Subjects |
이칭/별칭 | 정표,정문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강식 |
[정의]
조선 시대 부산 지역의 충신, 효자, 열녀 등에게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
[개설]
정려(旌閭)는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하여 부산 지역 출신의 효자(孝子) 충신(忠臣) 열녀(烈女)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을 세워 표창했던 일이다. 이를 정표(旌表), 정문 등이라고도 한다. 처음 정려를 세운 것은 신라 때였으며, 고려를 거쳐 조선에 와서는 전국적으로 많이 세워졌다. 조선 왕조는 유교적 풍속 교화를 위하여 효·충·열의 행적이 있는 사람에게 신분의 높고 낮음, 귀천(貴賤), 남녀를 가리지 않고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정표하였다.
조선 왕조의 정려 정책은 1392년(태조 1) 7월에 방침을 밝힌 이래 계속되었다. 조선 시대의 왕들은 즉위하면 반드시 충신, 효자, 의부(義婦), 절부(節婦)에 대해 지방에서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대상자는 문려(門閭)를 세워 정표하고, 그 집의 요역(徭役)을 면제하였으며, 또 일부에게는 행적에 따라 상직(賞職) 또는 상물(賞物)을 주었다.
따라서 사족(士族)의 경우에는 가문의 명예였으며, 노비의 경우에는 면천(免賤)하여 신분 상승을 가능하게 하는 등 실제 생활에 이익을 주어 후손들로 하여금 본받도록 했다. 정표자의 사례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교화의 일익을 담당함으로써 유교적 인간상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쟁 중에는 효자·충신·열녀 등의 수가 평시보다 아주 많았다. 그러나 어떤 경우는 수상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어 정표자의 진위(眞僞)가 자주 논의되었다.
정려와 정문의 유적은 전국적으로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는 곳이 많다. 부산 지역에서는 조선 시대에 건립된 정려가 동래현(東萊縣)과 기장현의 여러 곳에 남아 있다. 특히 부산 지역에서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정려가 다수 건립되었다.
[내용]
개항 이후 최근 서구화로 유교 문화와 가치관이 소멸되어 가고 있지만, 전통을 중시하며 옛 것을 이어 가는 모습도 존재한다. 부산 지역에서 정려가 보존되어 있는 구체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첫째, 효의 경우다. 성종대에 김득인(金得仁)이 여막살이 3년으로 정문을 세우고 관직을 제수 받았다. 동래현의 아전 옥석근(玉石根)의 아들 옥종손(玉宗孫)은 1507년(중종 2)에, 만호 김보문(金寶文)의 딸 김씨는 1491년(성종 22)에 각각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의 병을 낳게 해 정문과 역(役)을 면제 받았다. 황택룡(黃擇龍), 구주성(具周星), 김귀생(金貴生) 등은 전염병에 걸린 부모를 낳게 해 1610년(광해군 2) 각각 정문을 세워 표창했다. 또 동래구 석대동의 천씨 가문은 임진왜란 때 귀화한 천만리(千萬里) 후손으로 4대가 효자로 정려 받았다. 기장군 철마면에서는 1754년(영조 30)에 효자 서홍(徐弘)이 정려되었다.
둘째, 임진왜란을 당하여 일본군에 대항하다가 순절하는 충신과 열사가 나타났다. 임진왜란 때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1551∼1592]은 1594년(선조 27)에, 부산진 첨사 정발(鄭撥)[1553∼1592]은 1683년(숙종 9)에, 부산진 첨사의 막료 이정헌(李庭憲)[1559~1592]은 1691년(숙종 17)에 각각 정려하였다.
셋째, 열의 경우이다. 1670년(현종 11) 장소사(張召史)가 남편이 죽은 후 목을 매어 죽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그리고 순절한 충신 송상현의 첩 김섬(金蟾)에게는 열녀의 사당 편액(扁額)이 내려졌고, 정발의 첩 애향(愛香)과 동래 부민을 대표하여 김상(金祥)에게는 각각 이열녀(二烈女)와 이촌녀(二村女)의 사당 편액이 내려졌다. 기장군 철마면 연구리에서는 1741년(영조 17) 열녀 월성 김씨가 정려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