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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681
한자 忠孝烈
영어의미역 Loyal Servants, Filial Sons, and Devoted Daughters-in-law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영나

[정의]

부산 지역에서 배출된 충신과 효자 그리고 열녀들.

[개설]

충효열(忠孝烈)이란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녀자가 지조를 지켜 남편을 따라 순절하는 행실을 통칭한 말이다. 충효열을 삼강오륜(三綱五倫) 중에 삼강(三綱)이라고 하였으며, 유교 이념의 기본 덕목이다. 즉 삼강이란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을 의미한다. 조선에서는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받아들이면서 충효열을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으며, 양반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도 강조되었다.

[충신]

충(忠)은 삼강 행실의 첫째 덕목이다. 부산의 대표적인 충신으로는 정발(鄭撥)[1553∼1592], 이정헌(李庭憲)[1559~1592], 송상현(宋象賢)[1551∼1592], 조영규(趙英圭)[1535~1592], 노개방(盧蓋邦)[1563~1592], 윤흥신(尹興信)[?∼1592], 정운(鄭運)[1543∼1592] 등을 들 수 있다.

1. 정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고(子固), 호는 백운(白雲)이다. 할아버지는 돈령부 도정 정세현(鄭世賢)이고, 아버지는 군수 정명선(鄭明善)이며, 어머니는 관찰사 남숙(南淑)의 딸이다. 1579년(선조 12)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해남 현감(海南縣監), 거제 현령(巨濟縣令), 위원 군수(謂原郡守), 훈련원 부정(訓練院副正)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부산진 첨사(釜山鎭僉使)가 되었고, 이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일본군은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하였지만 조선 정부는 그 요구를 듣지 않았고, 정발은 힘써 싸웠으나 결국 성은 함락되었고 정발은 전사하였다. 그 후 1761년(영조 37) 좌수사 박재하(朴載河)가 전망비(戰亡碑)를 세웠으며, 1766년(영조 42) 첨사 이광국(李光國)정공단(鄭公壇)을 만들었다. 조정에서는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동래의 충렬사(忠烈祠)[후에 안락 서원(樂安書院)이 됨]에 제향되었다.

2. 이정헌

본관은 공주(公州), 자는 수경(守卿)이다. 진사 이석간(李碩幹)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였고, 조방장(助防將)이 되어 남쪽으로 내려와 성을 보수하였다. 정발이 이정현에게 간청하여 그의 막료가 되어 군무를 도왔고,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정발을 도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임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정헌에 대해서는 뒤늦게 알려졌다. 정공단에 합사되었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로 추증되었다.

3. 송상현

본관은 여산(廬山),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이다. 부사맹(副司猛) 송승은(宋承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용교위(進勇校尉) 송전(宋琠)이고, 아버지는 현감 송복흥(宋復興)이다. 어머니는 충의위(忠義衛) 김승석(金承碩)의 딸이다. 20세에 진사가 되고,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그 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정랑(正郞), 질정관(質正官), 은계도 찰방(銀溪道察訪), 배천 군수(白川郡守), 충훈부 경력(忠勳府經歷),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군자감정(軍資監正) 등을 역임하였다. 1591년 통정대부에 올라 동래 부사가 되었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일본군의 일부는 동래성으로 진출하였다. 이때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이각(李珏)은 울산 병영에서 동래부에 왔으나 도망쳤고, 양산 군수 조영규(趙英圭)는 동래를 구하기 위해 출병하였다. 일본군은 부산진성에서와 같이 동래성에서도 길을 열어 줄 것을 요구하였고, 송상현이 거절하자 15일에 공격하였다. 성은 함락되었고 송상현은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1594년(선조 27) 조정에서는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추증하였으며, 충렬(忠烈)의 시호를 내렸다. 그 후 1681년(숙종 7) 좌찬성(左贊成)으로 가증(加贈)되었고, 동래의 충렬사(忠烈祠), 송공단(宋公壇), 고부의 선충사(旋忠祠), 청주의 신항 서원(莘巷書院), 송경의 숭렬사(崇烈祠), 경성의 화곡 서원(禾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4. 조영규

본관은 직산(稷山), 자는 옥첨(玉瞻)이다. 수의부위(修議副尉) 조준(趙準)의 아들이다. 1554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훈련원 초관(哨官),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 제주 판관(濟州判官), 무장 현감(茂長縣監) 등을 거쳐 영암, 용천, 낙안, 영해 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1592년 양산 군수로 부임하였는데, 이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동래 부사 송상현을 찾아가 생사를 같이 하기로 기약하고, 양산으로 돌아가 어머니께 작별을 고했다. 그는 동래에서 송상현과 같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 후 1669년(현종 10) 송준길(宋浚吉)의 상계로 그의 효행과 충절이 알려져 숙종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동래의 안락 서원(安樂書院), 양산의 충렬사(忠烈祠), 장성의 모암 서원(慕巖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5. 노개방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유한(維翰)이다. 아버지는 노일(盧馹)이다. 1569년(선조 2) 소과에, 1588년(선조 21) 식년 문과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 동래 교수(東萊敎授)로 있었는데, 밀양 집에 휴가차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동래부에 가서 향교 성현의 위패를 정원루(靖遠樓)에 옮기고 난 후 송상현, 조영규, 문덕겸(文德謙) 등과 함께 동래성을 지키다가 전사하였다. 그의 아내 역시 밀양에서 일본군을 만나자 노개방의 홍패를 안고 높은 곳에 올라가 떨어져 자결하였다. 후에 도승지(都承旨)로 추증되었고, 동래의 충렬사(忠烈祠), 밀양의 중봉 서원(中峯書院)에 제향되었다.

6. 윤흥신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1582년(선조 15) 진천 현감(鎭川縣監)을 거쳐 임진왜란 때 다대포 첨사(多大浦僉使)로 부임하여 싸우다 전사하였다. 『징비록(懲毖錄)』에는 “다대 첨사 윤흥신은 힘써 싸우다 죽었다.”는 기록이 있고,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도 “왜적이 군사를 나누어 서평포(西平浦)와 다대포를 함락시키니 다대 첨사 윤흥신이 힘써 싸우다가 피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임진왜란이 끝난 1604년(선조 37) 6월 25일에 공표된 『선무공신녹권(宣武功臣錄券)』에도 원종(原從) 1등 공신으로 올라 있다. 1736년(영조 12)에 동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7. 정운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창진(昌辰)이다. 아버지는 훈련참군 정응정(鄭應禎)이다. 1570년(선조 3) 28세로 무과에 급제한 뒤 거산도 찰방(居山道察訪), 웅천 현감(熊川縣監), 제주 판관 등을 거쳤다. 1591년 녹도 만호(鹿島萬戶)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이 도망가서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때 이순신 휘하의 장수들은 관할론과 부원론으로 대립되었는데, 정운은 어영담(魚泳潭) 등 여러 장수와 함께 경상도도 우리의 국토라는 부원론을 주장하였다. 이에 이순신의 경상도 출병이 이루어졌다. 그는 이순신 군의 선봉장이 되어 옥포(玉浦), 적진포(赤珍浦), 당포(唐浦), 당항포(唐項浦), 한산도(閑山島) 해전에 참가하였다. 9월 부산포 해전 때 정운은 우부장(右部將)으로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604년(선조 37) 병조 참판에 추증되면서 충장(忠壯)의 시호를 받았고, 1796년(정조 20)에 병조 판서 겸 의금부 훈련원사로 가증되었다. 흥양 쌍충사(雙忠祠)에 이대원(李大源)과 함께 제향되었고, 영암의 충절사(忠節祠)와 동래 충렬사에도 제향되었다.

8. 24공신(功臣)

임진왜란 후 부사로 부임한 이안눌(李安訥)[1571~1637]이 공신녹권에 실려 있는 66명 중 24명을 골라 관찰사에게 청하여 요역을 면제하고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하게 하였다. 또한 충렬사의 한 건물의 현판에 이름을 새기게 했다. 이 건물을 별청(別廳)이라 하고, 여기에 이름을 새긴 사람들을 별청 공신(別廳功臣)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임진왜란 후 증직이 있었으나 1736년(영조 12) 다시 증직이 있었고, 1769년(영조 45)에는 가증되었다. 이때 가증된 24공신 중 강개련(姜介連), 송계남(宋繼男), 오춘수(吳春壽), 이복(李福), 송의남(宋義男) 등은 자손이 흩어졌고 후손이 없어서 가증할 수 없었다.

1)병조 참의(兵曹參議) 김정서(金廷瑞): 의병을 일으켜서 돌을 적진에 쏟아부어 전투에 승리하였다. 또한 곽재우와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켰다.

2)병조 참의 정승헌(鄭承憲): 의병을 일으켜서 계속 승리하였다.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때 변방의 정보를 가지고 가서 알리니, 선조가 금의(錦衣)를 벗어 하사하고 효유방문(曉諭榜文)을 써 주었다고 한다.

3)병조 참의 문세휘(文世輝): 의병을 일으켜서 승리하였다.

4)병조 참의 정순(鄭順): 의병을 일으켜서 승리하였다.

5)병조 참의 김일개(金一介): 울산성의 수진(守陣)에 종군하였고, 창의 모병하여 승리하였다.

6)병조 참의 김일덕(金一德): 동래현의 대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7)병조 참의 송창문(宋昌文): 의병장 김정서의 진에 종군하였다.

8)병조 참의 김근우(金根祐): 의병장 김정서의 진에 종군하였다. 도원수의 명으로 적세를 탐지하였고, 명나라 장군 만세덕(萬世德)의 유왜문(諭倭文)을 받았다. 그 진적(眞蹟)이 아직 후손가에 있다.

9)사재감(司宰監) 첨정(僉正) 강개련: 의병장 김정서의 진에 종군하였다.

10) 훈련원정(訓練院正) 김헐(金屹): 김일덕의 진에 종군하였다.

11) 병조 참의 이언홍(李彦弘): 김일덕의 진에 종군하여 적의 머리 13급을 바쳤다. 군공으로 향리의 역(役)을 면하는[免鄕]의 교지를 받았다.

12)훈련원정 김대의(金大義): 김정서의 진에 종군하였다.

13)장악원정(掌樂院正) 오홍(吳鴻)[1566~1597]: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치화(致化), 호는 연파(蓮坡)이다. 아버지는 오연국(吳連國)이며, 어머니는 김해 허씨(金海許氏)이다. 1588년(선조 21)에는 장사랑(將仕郞) 예빈시 참봉(禮賓寺叅奉)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일덕 의병장의 휘하에서 종군하여 군공을 세웠다. 그 후 1597년(선조 30) 남원성 밖에서 전투 중에 전사하였다.

14)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 박인수(朴仁壽): 본현의 관인이 모두 흩어질 때 끝까지 관을 배반하지 않았다.

15)병조 참의 김달(金達): 의병장 권응수(權應銖)의 진에 종군하였다.

16)병조 참의 송남생(宋男生): 의병장 김정서의 진에 종군하였다.

17)훈련원정 김기(金琦): 임진왜란 때 본부인(本府人)이 모두 흩어질 때 관을 배반하지 않았다.

18)병조 참의 황보상(皇甫祥): 임진왜란 때 본부인이 모두 흩어질 때 관을 배반하지 않았다.

19)훈련원정 이응필(李應弼): 의병장 김정서의 진에 종군하였다.

20)사도시 첨정(司導寺僉正) 송계남,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 이복,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 오춘수, 훈련원정 이복, 군자감 판관 송계남은 적에 부역하지 않고 전쟁에 참여하여 공로를 세웠다.

9. 기타 공신

1)증 호조 정랑(贈戶曹正郞) 문덕겸(文德謙): 교생(敎生)으로 교수 노개방이 어머니를 뵈러 간 사이에 일본군이 쳐들어오니 향교에 봉안했던 선현의 위패를 정원루로 옮기고 난 후 그 곁을 떠나지 않다가 순국하였다.

2)증 호조 정랑 양조한(梁潮漢): 동래성이 위급하자 향교의 위판을 옮겨 모시고 순국하였다.

3)증 호조 정랑 양통한(梁通漢): 형 양조한이 순국한 후 두 아들을 데리고 창녕 화왕산으로 곽재우를 찾아가서 의병으로 공을 세웠다.

[효자]

효(孝)는 삼강 행실의 둘째 덕목이다. 부산의 대표적인 효자는 옥종손(玉從孫), 김득인(金得仁), 효녀 김씨(金氏), 효자 효부 천씨(千氏) 일문 등을 들 수 있다.

1. 옥종손

옥종손은 동래현(東萊縣)의 아전인 옥석근(玉石根)의 아들이다. 나이 11살에 아버지가 문둥병을 앓았는데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은 곧 나았다. 조정에서 이를 알고 1507년(중종 2) 효자비를 세우고 단(壇)까지 지어 주었으며, 정표를 하고 세금이 면제되었다.

2. 김득인

김득인은 선조 대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은 매우 가난했으나 어머니의 끼니는 거르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황령산 아래에 장사를 지내고 여막살이를 3년 동안 하였으며, 아버지의 묘를 어머니 묘 앞으로 이장하여 또 3년간 여막살이를 하였다. 이때 김득인이 묘를 손질하는 것을 본 왜인들이 감동하여 이 일대에서는 노략질을 하지 않았다. 이후 왜인들은 김득인에게 미역과 쌀 등을 보내 주며 돌아가신 후에도 부모를 섬기는 정성에 고개를 숙여 존경을 표했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김득인에게 종사랑(從事郞)으로 풍저창(豊儲倉)의 부봉사(副奉事)라는 직첩을 내리고 포상하였다.

3. 효녀 김씨

성종 때 만호(萬戶) 김보(金寶)에게는 남매가 있었다. 그가 병에 걸렸을 때 딸이 하늘에 맹세하기를, “만약 하늘이 도우시지 못해 아버지께서 불행을 당하시면 나도 따라 죽으리라.”고 맹세하였다. 김보가 결국 죽자 딸은 남동생을 불러 “너는 살아서 어머니를 모셔라. 나는 죽어서 아버지 시중을 들겠다.” 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491년(성종 22)에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가 세워지고 부모를 모시려는 정신을 높이 평가하였다. 김씨의 묘는 운봉산 밑에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그 무덤을 파헤쳤는데, 임진왜란이 끝난 후 수사(水使)의 꿈에 김씨가 나타나 자신의 무덤을 원래대로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수사는 해골을 거두어 옛 무덤에 잘 묻고 제사를 지내 주었으며, 그날 밤 꿈에 김씨가 나타나 고맙다고 사례하였다고 한다.

4. 효자 효부 천씨 일문

동래 석대동 천씨 가문은 효자와 효부를 많이 배출하였다. 이 가문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구원병으로 온 천만리(千萬里) 장군의 후손이다. 1세 효자는 천찬식의 아들 천성태이며, 2세 효자는 천성태의 아들 천세모이며, 3세 효자는 천세모의 아들 천술운, 4세 효자는 천술운의 아들 천상련, 5세 효자는 천상련의 아들 천우형이었으며, 효부는 5세 효자 천우형의 아내 김해 김씨였다. 효자들은 부모가 살아계실 때는 지극히 섬겼고, 부모가 병에 걸리면 손가락이나 허벅지 살을 베어서 치병에 힘썼으며,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시묘를 할 때마다 큰 호랑이가 내려와 호위해 주었고, 묘 부근에서 샘물이 솟아났다. 그러나 시묘가 끝나면 호랑이는 사라지고 샘도 말랐다. 효부 김씨는 선대의 무덤 위에 지방의 권세가가 묘를 쓰고자 하였기 때문에 생명을 버려 이를 지켰다. 조정에서는 이들 효자와 효부에게 많은 포상을 내리고 정려각(旌閭閣)을 세워 기리게 하였다. 인근 주민들은 지금까지도 석대동 일원을 효자촌이라 부르며 매년 10월 10일 정려각에서 향사를 받들고 있다.

[열녀]

열(烈)은 삼강 행실의 마지막 덕목이다. 부산의 대표적인 열녀로는 전소사(田召史)와 함소사(咸召史)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부 관계이다. 전소자는 동래부 관속 최의준(崔義俊)의 어머니로 그 남편이 죽자 음식을 먹지 않고 굶어 죽어 열녀가 되었다. 전소자의 며느리이자 최의준의 아내 함소사 역시 남편이 죽자 굶다가 남편을 따라 죽었다. 이로써 열녀문을 나란히 세우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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