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8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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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運 |
영어음역 | Jeong Un |
이칭/별칭 | 창진(昌辰),충장(忠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산145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제장명 |
[정의]
임진왜란 때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한 무신.
[가계]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창진(昌辰). 아버지는 훈련원 참군 정응정(鄭應禎)이다.
[활동 사항]
정운(鄭運)[1543~1592]은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에서 태어났다. 1570년(선조 3) 무과에 급제하여 1579년(선조 12) 훈련원 봉사가 되고, 1580년에 금갑도 권관과 거산도 찰방을 역임하였다. 강직한 성격 탓에 일시 파직되었다가 1583년(선조 16) 강령 현감, 1584년 웅천 현감을 지냈다. 1585년 해주목 판관이 되었으나 목사의 미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1588년(선조 21) 사복시 판관을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선조 24) 전라좌도 녹도진의 만호로 부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전라좌수군을 경상도 수영의 원군으로 투입할 것을 논의하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정운은 이순신(李舜臣)이 신뢰하였던 핵심 장수로서 옥포, 적진포,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한산도 해전의 승리에 크게 기여하여 그해 8월 절충장군[정3품]으로 승진하였다.
9월 1일 정운은 부산포 해전에 참전하기 위해 몰운대(沒雲臺)를 지나던 중 ‘몰운대’에 자신의 이름인 ‘운(雲)’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고 죽음을 예견했다고도 한다. 결국 정운은 부산포 해전에서 이마에 왜군이 쏜 대철환을 맞고 전사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직속상관이었던 수사 이순신은 “나라가 오른 팔을 잃었다”라고 통곡하면서 정운의 넋을 위로하였다. 부산포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임진왜란 초기 해전 중 가장 큰 전과를 올리면서 승리하였다.
[묘소]
정운의 묘는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평활리 오소치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04년(선조 37)에 병조 참판에 증직되고, 1652년(효종 3) 영암의 선비들이 경호에 사당인 충절사를 세웠다. 충절사는 후에 녹도사와 함께 사액을 받았다. 1735년(영조 11)에 흥양 쌍충사에 제사를 내리고, 1795년(정조 19) 어제 어필로 충성을 포장하였다. 부산 동래 충렬사에도 배향되었다. 1796년(정조 20) 병조 판서와 의금부 훈련원사에 증직되었으며 1798년 충장(忠壯) 시호를 받았다. 같은 해에 어명으로 몰운대에 순절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