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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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書院 |
영어음역 | Seowon |
영어의미역 | Neo-Confucian Academy |
분야 | 종교/유교,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강식 |
[정의]
조선 시대에 성리학 교육과 선현을 모시기 위한 목적으로 부산 지역에 세운 사학(私學)의 명칭.
[개설]
서원(書院)의 설립은 후손과 문인을 포함한 사림들의 주관으로 이루어졌는데, 본읍이나 인근 지방관이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경우도 많았다. 서원의 인적 구성은 원임(院任)과 원생(院生)으로 나누어진다. 서원의 경제 기반은 토지와 노비였는데, 본래 사학이었으므로 원칙적으로 국가로부터의 경제적 지원은 없었다. 다만 국가가 승인하는 형식인 사액의 경우 면세전(免稅田) 3결(結)과 노비 1명이 주어졌다. 서원은 존현(尊賢)과 강학(講學)이라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서원의 구조는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사당(祠堂), 교육을 담당하는 공간인 강당, 유생들이 공부하며 숙식하는 공간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 크게 나뉜다.
조선 시대에 부산에는 안락서원이 유일하게 있었는데, 1976년 정화 공사 때까지 일반적인 서원의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지금 옛 안락서원이 있었던 지역이 안락동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안락서원의 원장은 『동래 향교지』에 실려 있는 『역대 임원록』을 살펴보면 경주 김씨, 남평 문씨 등 19개 가문의 향반(鄕班)들이 역임하고 있다.
[변천]
안락서원은 1605년(선조 38)에 동래 부사 윤훤(尹暄)이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 부사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을 모시기 위하여 동래읍성 남문 안에 송공사(宋公祠)를 세운 것이 시초이다. 1624년(인조 2)에 선위사(宣慰使) 이민구(李敏求)의 요청으로 충렬사의 사액이 있자, 부산진 첨사 충장공(忠壯公) 정발(鄭撥)을 함께 모셨다. 1652년(효종 3)에 동래 부사 윤문거(尹文擧)가 사당이 좁고 저습하며, 성문에 가까운 곳에 있어 시끄러울 뿐만 아니라, 송상현의 학행과 충절은 후학의 사표(師表)가 되므로 이를 후학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들어 충렬사를 내산(萊山) 밑 안락리로 옮기고, 강당과 동재·서재를 지어 안락서원이라 하였다.
1709년(숙종 35)에는 동래 부사 권이진(權以鎭)이 송상현과 정발이 순절할 때 함께 사절한 여러 사람들을 같이 모시기 위해 읍성 안에 있는 충렬사의 옛터에 별사(別祠)를 세우고, 정부에 알린 후 양산 군수 조영규(趙英珪) 등을 함께 모셨다. 1735년(영조 11)에 경상 감사 민응수(閔應洙)의 계청(啓請)으로 이듬해에 별사를 없애고, 여기에 모신 여러 사람들을 안락서원의 충렬사에 함께 모셨다. 동시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다대 첨사 윤흥신(尹興信)을 다시 모시고, 임진왜란을 당하여 부군과 운명을 같이 한 송상현의 첩 금섬(金蟾)과 정발의 첩 애향(愛香)을 충렬사의 동문 밖에 별도로 정려(旌閭)를 지어 널리 알려지도록 하였다. 안락서원은 임진왜란 때의 충신열사들을 모셨기 때문에 흥선 대원군(興宣 大院君)이 서원의 철폐를 단행했을 때도 헐리지 않았다.
[현황]
안락서원은 1766년(영조 42)에 강당인 소줄당(昭崒堂)이 보수되고, 이후 증보가 거듭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서원의 제사와 교육이 민족정기를 북돋운다고 하여 온갖 방법으로 방해하였으므로 건물이 낡아졌다. 해방 후 서원 교육은 신교육에 밀려 흐지부지해졌다. 사회의 혼란 속에 잘 보존하지 못하다가 1976~1978년의 정화 공사에 따라 서원의 건물은 헐리고, 새로운 건물이 세워졌다. 원래 안락서원의 강당인 소줄당은 충렬사 안으로 옮겨 세워져 있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재단법인 충렬사 안락서원에서, 5월 25일에는 부산 시민의 정성을 모아 부산광역시에서 제향을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