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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민족청년동맹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620
한자 民主民族靑年同盟
영어공식명칭 Democratic and National Youth Alliance
이칭/별칭 민민청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선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청년 단체
설립자 이종률
설립 시기/일시 1960년 6월 12일연표보기 - 결성
해체 시기/일시 1961년 5월 16일 이후연표보기 - 해체
최초 설립지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정의]

부산 지역에서 설립된 진보적 청년 단체.

[설립 목적]

민주민족청년동맹은 4·19 혁명으로 도래한 새로운 정국에 대응하여, 무산 청년을 기반으로 자주적 통일과 진보적 민주 체제를 지향하는 청년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이를 위해 정치적으로 민족 혁명론을 추구하는 한편 1955년에 반둥 회의에서 제시된 탈식민지 중립 노선을 지향하였다.

[변천]

1960년 5월 초 부산대학교 교수 이종률이 새로이 전개될 정치 투쟁을 뒷받침하기 위한 청년 조직의 필요성을 제자들에게 역설하였다. 이에 이종률부산대학교동아대학교 제자들을 중심으로 부산 지역의 진보적인 청년층이 결집되었고, 그해 6월 12일에 부산상공회의소 강당에서 114명의 발기인으로 민주민족청년동맹 창립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후 부산에서 서울로 민주민족청년동맹 중앙맹부를 이전하였는데, 여기에는 부산 출신의 진보적 청년 그룹인 암장그룹이 주축을 이루었다.

부산의 민주민족청년동맹 중앙맹부민주민족청년동맹 경남맹부민주민족청년동맹 부산맹부로 변경되었다.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북맹부는 1961년 1월 초에 발의되어 그해 3월 4일에 대구에서 결성 대회를 개최하였다.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북맹부는 서도원이 위원장을, 도예종이 간사장을, 송상진이 사무국장을 역임하는 등 대구 지역 청년계의 중심인물이 주도하였다. 같은 해 5월 16일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 이후 민주민족청년동맹은 해체되었으며, 중심인물은 군사 정권의 혁명 재판소에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통일방안심의위원회 사건[1961년 12월], 민족일보 사건[1961년 7월], 경상남도 민주민족청년동맹 사건[1961년 11월], 부산민주민족청년동맹 사건[1961년 12월] 등으로 기소되어 구속, 수감되는 곤욕을 치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민주민족청년동맹의 기본 업무는 조직을 확장하는 것이고, 주요 활동은 통일 운동을 선도하는 것이었다. 조직 확장 사업에서 가장 활기를 띤 것은 애초 민주민족청년동맹이 창립된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남맹부[이 시기에 부산은 직할시가 아니라 경상남도의 일부였음]였고, 민주민족청년동맹 부산맹부민주민족청년동맹 마산맹부가 속하였다. 이 가운데 민주민족청년동맹 부산맹부는 창립 대회 이후 부산진 지구, 동래 지구, 영도 지구, 동구 지구를 조직하여 민주민족청년동맹의 가장 큰 조직 기반을 형성하고 있었다.

민주민족청년동맹의 주요 사업은 통일 운동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고취시키고 범국민적 통일 운동 단체를 창립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남맹부는 1960년 8월 17일에 ‘8·15의 밤’을 개최하였는데, 이는 4·19 혁명 시기의 정치의식을 문화 행사라는 형식으로 녹여 냄으로써 민주적·민족적 정서를 결속시키는 것이었다. 그해 9월 30일에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남맹부는 의열단 창립자인 백민(白民) 황상규(黃尙奎)의 추모제를 열어 반(反)제국주의 자주 의식을 고취시켰다.

같은 해 10월 30일에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남맹부가 개최한 ‘민족 통일 대강연회’에는 1,000여 명의 청중이 모였는데, 강연에 이은 설문 조사를 통해 남북 협상 통일론 등 진보 세력의 통일 방안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였다. 연말에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남맹부는 ‘민족 문화인 망년회’를 개최하여 자주적 평화 통일과 남북 교류를 담은 남북 협상 통일론을 선전하고, 보안법 개정의 비판과 같은 정치 현안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기반으로 민주민족청년동맹은 1960년 8월 20일 이종률 등 민족건양회 인사들이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를 발의한 이후 1961년 2월 25일 천도교 대강당에서 창립 대회가 개최되기까지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를 결성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남맹부는 1961년 4월 18일 민족자주통일경남협의회의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외에도 민주민족청년동맹은 7·29 총선에서 진보적 정치인의 선거를 지원하고, 교원 노조의 합법화 투쟁에 동참하였으며, 경상남도 지역 원로들의 모임인 경남노인회의 각종 활동을 실무적으로 뒷받침하였다. 1961년 초에는 전국적으로 전개된 한미 경제 협정 반대 투쟁과 2대 악법 반대 투쟁에서 민주민족청년동맹 중앙맹부민주민족청년동맹 경남맹부·경북맹부가 함께 적극적인 투쟁에 나섰다. 또한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남맹부는 부산 지역의 학생 조직인 경남학생총연합후진성극복학생연구회 등 학생 조직과 긴밀한 연계를 가지고 지도성을 발휘하였다.

[의의와 평가]

민주민족청년동맹이승만 정권하의 청년 단체와 달리, 특정 정파에 속하지 않은 진보적 청년들로 구성되어 지역 사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청년 운동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민주민족청년동맹이 가진 가장 큰 의의는 자주적 통일 운동을 위해 청년층을 조직화함으로써,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및 지방 협의회를 결성하는 데 추동력을 발휘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부산 지역이 4·19 혁명의 정점이자 총결산이라 할 수 있는 통일 운동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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