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8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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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後進性克復學生硏究會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종세 |
[정의]
1950년대 후반 부산 지역의 대학생들로 조직된 비공개 학생 운동 단체.
[설립 목적]
후진성극복학생연구회는 한국 사회의 정치 경제적 구조에 대한 인식을 기반으로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사회 역량을 육성하고 조직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변천]
후진성극복학생연구회[약칭 후연회]는 1950년대 후반 부산수산대학[현 부경대학교], 부산대학교, 동아대학교 학생의 연합 조직으로 결성되었다. 중심인물은 부산수산대학 나택균, 부산대학교 손병선, 동아대학교 도강호 등이었다. ‘후진성’이라는 개념은 당시 부산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였던 이종률의 민족 혁명론을 형성하고 있는 ‘후진성 지역’ 이론에서 차용한 개념이다. 설립 이후 줄곧 비밀결사에 가까운 형식으로 유지하다가, 1960년 4·19 혁명으로 공개적 활동을 시작하였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후진성극복학생연구회의 중심인물이 혁명 검찰에 기소되어 실형을 선고받고, 일부는 공개적인 전향을 선언하면서 조직이 해체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설립 후 1950년대 후반의 주요 활동은 회원을 확보하는 조직 사업과 회원들의 학습이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후진성극복학생연구회는 이전과 달리 학내외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우선 시국 강연회를 개최하여 4·19 혁명 이후 한국 사회가 지향할 바와 이를 위한 구체적 방략에 대한 논의를 활성화하는 한편 통일 방안을 논의하는 시민 토론회를 주관하여 통일 문제에 대한 여론을 환기하고 관심을 제고시키는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한편으로 1960년 11월 1일 서울대학교를 시작으로 전국의 대학에서 민족통일연맹이 결성되기 시작하는 데 호응하여 부산에서도 민족통일연맹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부산대학교와 부산수산대학에서 민족통일연맹을 결성하고, 1961년 5월 5일 서울에서 결성된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약칭 민통전학련]에 참여하였다. 부산대학교와 부산수산대학 민족통일연맹에서 중심인물은 모두 후진성극복학생연구회의 회원이었다. 1961년 3월 후진성극복학생연구회는 장면(張勉) 정권의 「데모 규제법」과 「반공 특례법」에 대한 전국적인 저항이 ‘2대 악법 반대 투쟁’으로 확산되었을 때 부산에서도 반민주악법반대 경남학생공동투쟁위원회를 조직하여 2대 악법 반대 투쟁을 선도하였다.
[의의와 평가]
후진성극복학생연구회는 개인주의에 매몰되어 있던 부산 지역 대학가의 분위기를 일소하여, 4·19 혁명 시기 대학생의 역량을 통일 운동과 민주화 운동으로 견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