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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장그룹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176
한자 岩漿-
영어공식명칭 Amjang Group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종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청년 단체
설립자 이수병 등
설립 시기/일시 1954년연표보기 - 설립
개칭 시기/일시 1955년연표보기 - 일꾼회에서 암장그룹으로 개칭
최초 설립지 부산광역시
주소 변경 이력 서울특별시

[정의]

1954년 부산에서 설립되어 4·19 혁명 시기에 활동한 청년 단체.

[설립 목적]

암장그룹은 사회 과학 학습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의 현실을 구조적으로 분석하고 진보적 대안을 모색하고자 설립하였다.

[변천]

1954년 가을 부산사범학교[현 부산교육대학교]의 이수병, 김종대, 김정위, 박영섭, 유진곤과 부산고등학교의 김금수, 이영호, 최종국, 경남공업고등학교의 박중기 등 비판적 사회 인식을 가진 학생들이 모여 사회 과학 연구 모임으로 결성하였다. 처음 이름은 일꾼회였으나 노동 운동의 이미지를 연상케 할까 우려하여 이듬해인 1955년 암장(岩漿)이라고 바꾸었다. ‘암장’이란 땅 속 깊은 곳에 뜨겁게 녹아있는 마그마를 뜻하는 것으로, 화산이 터지는 것처럼 변혁 운동의 분출을 예고하는 상징성을 그 안에 품고 있었다.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후 이들은 각지로 흩어졌다가 1959년 무렵 대학 진학, 직장 근무 등을 이유로 서울에서 다시 만났다. 이듬해인 1960년 4·19 혁명이 발발하자 이들은 부산대학교 교수 이종률의 제안으로 민주민족청년동맹[약칭 민민청]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약칭 민자통]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로 암장 멤버 대부분이 반국가 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하는 활동을 했다는 죄목을 군사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투옥되었으므로 암장그룹은 해체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암장의 멤버들은 1964년 ‘인민혁명당 사건’과 1974년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 사건’의 조작에 연루되었다. 결국 이수병과 김용원은 사형당하고, 유진곤은 무기 징역, 김종대는 징역 20년, 박중기는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다른 멤버들도 곤욕을 치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결성 초기의 주요 활동은 학습으로서, 사회 과학 서적과 마르크스 엥겔스의 원저 등을 읽고 토론하면서, 체계적인 학습을 지속적으로 진행하였다. 암장 성원들은 ‘1. 약속 시간은 철저히 지킨다 2. 돌아서서 비난하지 않는다 3. 비밀은 눈치라도 남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 4. 일은 많이 하고 공(功)은 남에게 준다’는 수칙을 정하고 스스로를 담금질 하였다. 1960년 4·19 혁명이 발발하자 이들은 개별적으로 7·29 총선에 참여한 혁신 정치인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고, 8월 27일 부산상공회의소에서 민주민족청년동맹의 주선으로 시국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후 김금수를 간사장, 박중기를 투쟁국장, 박영섭을 조직국장으로 하여, 부산에 있던 민민청 중앙맹부를 서울로 이전 조직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동시에 이들은 대학 민족통일연맹의 통일 운동을 주도하고,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의 결성에 실무를 담당하였다.

[의의와 평가]

암장그룹은 4·19 혁명 시기에 활동한 청년 단체가 지닌 사회 과학 인식과 결속력의 수준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특히 민주민족청년동맹을 기반으로, 대학 민족통일연맹과 민자통중앙협의회 활동을 통하여 4·19 시기 통일 운동에서 청년층의 중심 대오를 이루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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