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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379
한자 李銖秉
영어음역 Yi Subyeong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종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회 운동가
성별
본관 인천(仁川)
대표경력 경희대학교 민족통일연구회 회장
출생 시기/일시 1937년 1월 15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50년 4월 - 부림공립초등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53년 3월 - 신반중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53년 4월 - 부산사범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56년 3월 - 부산사범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56년 4월 - 부산대학교 교육학과 입학. 1년 수료
수학 시기/일시 1959년 3월 - 신흥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과 2학년 편입
활동 시기/일시 1954년 - 일꾼회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55년 - 일꾼회를 암장으로 재편
활동 시기/일시 1957~1958년 5월 - 의령 갑을국민학교 교사로 재직
활동 시기/일시 1960년 11월 - 경희대학교 민족통일연구회 결성, 회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61년 3월 - 『민족 일보』 수석 합격
활동 시기/일시 1961년 5월 13일 - 남북 학생 회담 환영 및 민족 통일 촉진 궐기 대회에서 연설
활동 시기/일시 1961년 5월 18일 - 5·16 군사 쿠데타 세력에 체포됨
활동 시기/일시 1961년 9월 30일 -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사건으로 징역 15년형 선고받고 수감
활동 시기/일시 1968년 4월 17일 - 출소
활동 시기/일시 1971년 9월 - 경락연구회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74년 4월 -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에 연루
활동 시기/일시 1975년 4월 8일 - 대법원 재심에서 유죄 확정 판결
활동 시기/일시 1975년 4월 9일 - 사형 집행
몰년 시기/일시 1975년 4월 9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 4월 16일 - 경희대학교에서 15주기 추모 행사
추모 시기/일시 1991년 3월 2일 - 이수병기념사업회 발족
추모 시기/일시 1991년 이후 매년 4월 8일 - 경희대학교에서 추모제 개최, 묘소 참배
추모 시기/일시 1991년 4월 17일 - ‘4월 혁명상’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2년 4월 6일 - 이수병 일대기 『암장』 출간
추모 시기/일시 1995년 10월 22일 - 묘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2002년 9월 12일 -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조작이라고 발표
출생지 이수병 출생지 -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손오리 866
거주|이주지 이수병 이주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이문동
학교|수학지 부림공립초등학교 - 경상남도 의령군 신반면
학교|수학지 신반중학교 - 경상남도 의령군
학교|수학지 부산사범학교 -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구 교사]지도보기
학교|수학지 부산대학교 -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산대학로 63번길 2지도보기
학교|수학지 신흥대학교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경희대로 26
활동지 일꾼회[암장 그룹] - 부산광역시
활동지 민족일보사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정동 1-48
활동지 민족통일연구회 - 서울특별시
활동지 경락연구회 - 서울특별시
묘소 이수병 묘소 - 경상남도 의령군

[정의]

현대 사회 운동가이자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사형수.

[가계]

본관은 인천(仁川). 아버지는 이정항이고, 어머니는 황정분이다. 빈농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 출생과 수학

이수병(李銖秉)은 1937년 1월 15일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손오리 866번지에서 태어났다. 1950년 4월 의령 부림공립초등학교[현 부림초등학교], 1953년 3월 신반중학교를 졸업하고 1953년 4월 가난한 수재들이 모여드는 부산사범학교[현 부산교육대학교]에 진학하였다. 이듬해 고학생의 경제 자립을 위한 교내 모임인 노작회에 가입하여 독서 토론을 주도하며 활동하였다.

1954년 가을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사회 과학 연구 모임을 결성하였다. 노작회를 통해 만난 김종대, 김정위, 박영섭, 유진곤과 부산고등학교에 다니는 김금수·이영호·최종국, 경남공업고등학교의 박중기 등 비판적 사회 인식을 가진 친구들이 대상이었다. 모임의 명칭은 ‘일꾼회’라고 하였다가, 이듬해인 1955년 초 암장(岩漿)으로 바꾸었다. ‘암장’이란 땅속 깊은 곳에 뜨겁게 녹아 있는 마그마라는 뜻으로, 변혁 운동을 위한 역량의 축적을 의미하였다.

1956년 3월 부산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4월, 이수병부산대학교 교육학과에 진학하여 1년 동안 수학하였다. 1957년 의령군 갑을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이듬해 5월까지 재직하다가, 1959년 3월 신흥대학교[현 경희대학교] 경제학과 2학년에 편입하였다. 이 무렵 암장 회원 대부분이 서울에서 다시 모이게 되었다.

2.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활동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이수병은 7·29 총선에서 혁신계 정치인의 선거 운동을 지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9월 들어 통일 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하자 이수병은 11월 경희대학교에서 민족통일연구회를 결성하고 회장이 되어, 11월 25일 경희대학교에서 ‘통일 문제 대강연회’ 개최 등 학생층의 통일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1961년 2월 15일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약칭 민자통]의 창립과 5월 5일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약칭 민통전학련]으로 결실을 맺었는데, 이수병은 이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에 5월 13일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가 주최한 ‘남북 학생 회담 환영 및 민족 통일 촉진 궐기 대회’에서 이수병은 학생 대표로 나서서 남북 학생 회담을 비롯한 남북 간의 교류와 협상을 통한 통일의 달성과 민중 생존권의 확보를 주장하였다.

이날 이수병의 연설은 대회에 참여한 수만 명의 서울 시민에게서 큰 호응을 이끌어 냈고, 이로써 그는 통일 운동가의 명성을 얻었다. 동시에 이수병은 이 무렵 장면(張勉) 정권이 추진하는 한·미 경제 협정과 반공법 및 데모 규제법 제정에 대한 진보 진영의 ‘한·미 경제 협정 반대 투쟁’과 ‘2대 악법 반대 투쟁’의 선두에서 참여하였다. 한편 1961년 2월 13일 창간된 『민족 일보』의 공채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진보적 언론 운동에 참여할 기반을 마련하였다.

3. 인혁당 재건위 사건

하지만 이러한 활동은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범죄시되어, 5월 18일 이수병은 고향인 의령으로 가던 중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사건으로 혁명 재판소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가 1968년 4월 17일 출소하였다.

1971년 9월 이수병은 경락연구회를 설립하여 4·19 혁명 시기의 활동가들을 다시 결집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북맹부의 간사장을 지낸 서도원을 좌장으로 서울, 광주, 대구, 부산을 포괄하는 조직 체계를 형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조직은 박정희(朴正熙) 정권에 의해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불법 단체 ‘인혁당 재건위’[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로 조작되어, 1974년 4월 세칭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기소되었다. 가족 면회가 금지된 가운데 악랄한 고문이 자행되고, 날조된 공판 조서를 바탕으로 비공개 상태에서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사건 관련자 가운데 이수병·서도원·도예종·하재완·송상진·우홍선·김용원·여정남 등 8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1975년 4월 8일 대법원장 민복기와 12명의 재판관이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하루도 지나지 않은 이튿날 새벽 이수병을 포함한 8명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저술 및 작품]

1950년대 중반 부산사범학교 교지 『종(鐘)』에 게재한 「고학생의 피」는 당시의 사회 구조적 모순을 매혈(賣血)에 비유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고학생의 현실을 표현하였다. 역시 『종』에 게재한 「지속 산업」에서는 미군이 주둔한 부산의 정황을 묘사하면서 매춘의 사회적 배경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이 밖에 게재 불허로 실리지 못한 몇 편의 원고가 있다.

1960년 6월 19일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전국 남녀 대학 경제학 토론 대회’에서 한국 농업을 잠식하는 미국 농산물 원조 문제를 다룬 ‘한국 경제의 대미 종속적 구도’로 ‘발표상’을 수상하였다. 1960년대 옥중에서 집필한 소설 『수경 선생(水鏡先生)』은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체포될 때 유실되고 말았다.

[묘소]

경상남도 의령의 선산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90년 4월 16일 경희대학교 서울 교정 노천 극장에서 15주기 추모 행사가 열렸고, 1991년 3월 2일 이수병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으며, 1991년 4월 17일 사월혁명연구소가 시상하는 ‘4월 혁명상’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1992년 4월 6일 이수병 일대기를 그린 『암장』[지리산]이 출간되었고, 1995년 10월 22일 경상남도 의령에 있는 묘소에 묘비가 건립되었으며, 2002년 9월 12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조작이라는 사실을 발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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