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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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巽 |
영어음역 | Gwon Son |
이칭/별칭 | 권상욱(權相旭),확우(蠖宇) |
분야 |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884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종세 |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통일 운동가.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본명은 권상욱(相旭), 호는 확우(蠖宇). 1897년(고종 34) 경상북도 안동에서 아버지 권영진(權寧鎭)과 어머니 함안 조씨(咸安趙氏) 사이의 6남 4녀 가운데 큰아들로 태어났다. 권영진은 안동의 천석군 부호로서 개항기 안동에 협성학교를 설립한 개명 지식인이었다. 권손(權巽)의 동생 권상우는 일본 와세다대학에 유학 중 항일 운동을 전개하다가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권상우는 8·15 해방 후 출옥하여 고향에 돌아왔으나, 경찰에 체포되어 피살되었다.
막내 동생 권오규는 안동농림학교 학생회장으로 활동했으나 퇴학당하고, 안동사범학교에 진학하였다. 하지만 이승만(李承晩) 정권에 의해 검거되어 김천소년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다른 형무소로 이감한다는 핑계로 끌어내져 살해당하였다. 권손은 안동 김씨(安東金氏) 김금조와 결혼하여 권우행, 권벽뢰, 권경복, 권명군, 권경업 등 2남 3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권손은 어릴 적 한학(漢學)을 익혀 한학에 매우 밝았다. 20세기 초 대구에 있는 기독교 계열의 계성학교에 재학하였다. 일제 강점기 권손은 안동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탓에 권손의 형제가 모두 좌익으로 낙인 찍혀, 8·15 해방 직후 좌우 대립이 격화되던 시기 동생 권상우와 권오규는 비극적인 삶을 겪었다. 권손 역시 6·25 전쟁이 터지자 불길한 일을 직감하고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이주했는데, 권손 일행이 떠난 직후 권손을 체포하기 위해 경찰이 집에 들이닥쳤다. 권손은 이 소식을 후일 대구를 방문하여 전해 들었다.
당시 부산에는 전쟁을 피해 이주한 전국 각지의 지식인들이 거주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지식인의 사랑방에 출입하며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부산에 이주한 권손은 평양 출신 서예가 김광업(金廣業), 김해 출신 한의사 표춘포, 서예가 정현복(鄭鉉福), 한국화가 허민(許珉) 등의 사랑방에 출입하며 이들과 교유하였다. 이외에 승려이자 제헌 국회 의원을 지낸 최범술(崔凡述), 서예의 달인 오제봉(吳濟峯) 등과도 교류했는데, 이는 권손의 높은 한학 수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솔사에 있으면서 자주 부산을 드나들었던 최범술은 한학에 대해서는 권손에게 자문할 정도였으며, 그 자신이 저명한 서예가이자 최범술의 제자이기도 했던 조영조(曺寧助) 역시 한학의 자문이 필요할 때는 권손을 찾을 정도였다. 이종률(李種律)과 만났던 것도 이즈음 부산에서였다. 이종률은 일제 강점기 권손의 항일 투쟁을 높이 평가하였고, 이후 두 사람은 평생의 지기(知己)가 되었다.
1950년대의 억압적인 정치 환경 속에서 은인자중하던 권손은 1960년 성난 사자들의 4·19 혁명으로 폭력 정권의 핵심인 이승만이 제거되자 비로소 사회 전면에 나섰다. 이때 권손이 활동을 재개한 공간은 경남노인회였다. 경남노인회는 1960년 6월 권손, 정순종(鄭淳鍾), 최천택(崔天澤), 유혁(劉赫) 등 지역의 원로 지식인이 결성한 일종의 원로 단체였다. 친일 경력이 없고 통일을 지향하는 인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환영했으며, 가입에 별다른 제한이 없었기에 경남노인회는 다양한 편력을 가진 인물들을 모으는 데 성공하여 한때 참여 인원이 1,200여 명에 이르렀다.
노인층의 특성상 통일 문제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다른 어떤 집단에 비해 월등했던 점에 착안해 경남노인회는 통일 운동에 주력하였다. 1960년 후반 통일 운동이 벌어졌을 때 경남노인회는 앞장서서 호응했으며, 1961년 2월 25일 서울에서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가 결성되자, 부산에서도 4월 18일 민족자주통일 경남협의회를 결성하였다. 민족자주통일 경남협의회에서 권손은 의장을 역임하며 통일 논의의 확산과 통일 운동의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활약하였다. 이러한 경남노인회의 활동에는 민주민족청년동맹 부산경남맹부가 실무적인 지원을 도맡아 하였다.
하지만 1961년 5월 16일 박정희(朴正熙)의 군사 정변으로 권손의 통일 운동은 범죄로 몰리게 되었고, 그는 도피 끝에 체포되었다. 65세라는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권손은 부산진구 전포동의 육군형무소와 서구 동대신동의 부산형무소에서 6개월간 수감되어 고통을 겪어야 하였다. 출소 후 권손은 부산에서 거주하다가 1988년 5월 7일 사망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의 선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