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3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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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劉赫 |
영어음역 | Yu Hyeok |
이칭/별칭 | 유선홍(劉善泓),일정(一丁)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동 시영아파트 7동 101호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종세 |
[정의]
현대 부산에서 활동한 통일 운동가.
[가계]
호는 일정(一丁). 1918년 경상남도 양산군 동면 석산리 252번지에서 소작농이던 아버지 유수근(劉守根)과 어머니 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 학창 시절
유혁(劉赫)[1918~2001]은 본명이 유선홍(劉善泓)이다. 1930년 양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양산공립보통학교 시절 학업이 우수한 학생으로서 졸업식에서 도지사상을 수상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유력자인 학부형을 둔 학생이 수상하게 되었다. 이런 부당함에 항거하여 일본 황태자의 탄생일을 기념하며 하는 수상식 행사에서 집단 보이콧을 주동하였다. 이에 행사를 망쳐 위신을 구긴 교장은 유혁에게 주기로 한 대구사범학교 진학을 위한 교장 추천권을 주지 않는 것으로 보복하였다. 대구사범학교 진학이 좌절되자,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갔다. 1932년 일본 미야자키[宮崎] 현 연강 시(延岡市)의 해동(海東)고등소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2. 중국에서의 활동
유혁은 1936년 중국 동북으로 갔다. 하얼빈에 도착한 유혁은 김하봉의 소개로 빈강 성(濱江省) 주하 현(珠河縣) 하동(河東) 농촌에서 의병장 허위(許蔿)의 막내아들인 허준리(許俊理)를 만났다. 하동 농촌은 하얼빈에서 무단장[牡丹江]으로 가는 중간 즈음에 있는 곳으로, 벼농사 지대였기 때문에 거주민 대부분이 한국인으로 이루어진 고장이었다. 허준리와의 만남을 계기로 유혁은 하동 농촌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10여 년 동안 허준리의 지도를 받았다.
유혁에게 일정이라는 호를 지어 준 이도 허준리였다. 허준리는 “농민이 되면 세계에서 제일가는 농민이 되고, 노동자가 되면 제일가는 노동자가 되고, 무엇을 하든지 제일가는 것이 되라. 한 놈이 되라는 뜻”에서 ‘일정’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1938년 간도 성 옌지 현[延吉縣]에서 복성초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사로 수년간 재직한 후 하동 농촌에서 농사연합회 서기로 수년 동안 재직하였다. 1943년 하얼빈에서 조선독립동맹의 하부 조직인 북만(北滿)특별공작위원회의 결성에 참여하고 반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1942년 중국 연안에서 창립된 조선독립동맹은 국제도시의 성격이 강한 하얼빈을 주시하다가, 1943년 지역 조직을 결성하였던 것이다. 유혁의 경우 일찍부터 김원봉(金元鳳)과 연계를 가져 오던바, 1943년 6개월간 후보 맹원 단계를 거쳐 정식으로 조선독립동맹의 맹원이 되었다. 유혁을 포함하여 하동 농촌에서 13명이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공작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구체적인 활동은 13명의 활동가가 13개 조를 만들어 하동 관내에 각각의 담당 마을을 정하여 진행되었다.
주요 활동은 연안의 본부에서 받은 국제 정세에 관한 정보를 마을에 전달하여 정보전과 여론전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조선독립동맹에서는 일찌감치 일본의 패망을 예상하고 선전전을 펼쳤다. 이 외에 조직원을 확보하는 일을 일상적으로 병행하였고, 때로는 김원봉의 요청으로 군자금을 조달하기도 하였다.
3. 귀국 후의 활동
1945년 광복이 되면서 유혁은 고향인 양산으로 귀향하였지만, ‘조선 의용대 돌아오다’라는 벽보가 붙자 우익의 테러를 염려한 동생의 권고로 부산으로 이주하였다. 유혁은 남로당[남조선노동당]의 당적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1947년 10월 경남농민연맹에 가입하여 선전부 문서 과장으로 활동하였고 경남농민연맹의 제5대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경남농민연맹은 부산을 중심으로 경남 전체를 연결하는 해양 블록을 만들었다.
이 일로 1949년 8월 9일 피검되어, 1950년 8월 9일 대구고등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출옥 후 부산에서 상업에 종사하며 지냈다. 4·19 혁명으로 진보 세력이 대두하는 것을 보고 이에 호응하여, 1960년 6월 정순종·권손·최천택(崔天澤) 등과 함께 경남노인회를 조직하였다. 경남노인회는 일종의 원로 단체로, 친일 경력이 없고 통일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환영하였으므로 한때 참여 인원이 1,200명에 이르렀다.
경남노인회를 결성하고 활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부산대학교 교수였던 이종률(李種律)의 지원으로, 그의 영향력 아래 있던 민주민족청년동맹의 실무적 뒷받침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유혁과 권손은 이종률과 긴밀한 신뢰 관계를 형성하였다. 4·19 혁명으로 통일 문제가 우리 사회의 화두로 대두되자, 경남노인회는 통일 운동에 앞장섰다. 경남노인회는 1961년 4월 18일 경상남도 민족자주통일협의회[약칭 민자통경남협의회]의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그 중심에 있던 유혁은 총무 부장 및 상임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혁은 3월 17일 2대악법반대공동투쟁위원회 기획 위원으로 선임되어 3월 25일 부산역에서 열린 시민 성토대회를 기획 주관하였고, 5월 13일 중구 중앙동 노동 회관 앞 광장에서 경상남도 민족자주통일협의회가 주최한 남북 학생 회담 환영 및 통일 촉진 시민 궐기 대회를 주도하였다. 이 일로 5·16 군사 쿠데타 이후 투옥되어, 경상남도 민족자주통일협의회 총무 부장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군사 법정에서 10년형을 언도받고 5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87년 민족자주평화통일회의의 결성에 참여하여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 및 부산회의의 고문으로 활동하였고, 조국통일범민족연합운동과 민주개혁국민연합 부산본부의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부산경남역사연구소[현 부경역사연구소]의 지도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2001년 5월 12일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동 자택에서 향년 만 8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애국지사 고 일정 유혁 선생 민주 민족장’으로 장례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