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1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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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斗榮 |
영어음역 | Jo Duyeong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성로 43[수영동 229-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종세 |
[정의]
현대 부산 「수영 야류」의 말뚝이춤의 명인.
[활동 사항]
조두영(趙斗榮)은 본관이 함안(咸安)이며, 1892년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들을 비롯하여, 수영동에 거주하는 함안 조씨(咸安趙氏) 일가에서는 「수영 야류」[수영 들놀음]의 명인이 다수 배출되었다. 「수영 야류」의 가면인 수영 탈 제작의 기·예능 보유자인 조덕주(趙德周)[1914~1983]는 조두영의 장남이다. 차남 조덕칠(趙德七)[1932~1995]은 말뚝이 역을 맡아 기·예능 보유자 후보가 되었다.
또한 「수영 야류」의 기·예능 보유자인 조재준(趙在俊)[1906~1974, 말뚝이 역]과 조복준(趙福俊)[1920~1966, 악사] 형제, 그리고 조홍복(趙弘福)[1933~2023, 영감 역]은 모두 조두영의 일가 조카이다. 이로써 수영성 북문 일대의 조씨 일가는 수영성 동문 일대의 태씨 일가와 함께 「수영 야류」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였다.
1946년 정월에 조두영은 최한복(崔漢福)[1885~1968], 태명준(太命俊)[1906~1979] 등과 함께 부산수영국민학교[현 부산수영초등학교]에서 「수영 야류」를 재현하는 공연을 개최하였다. 이 공연에서 조두영은 말뚝이 역을 맡았으며, 태명준은 장고, 최한복은 수양반, 강덕수(姜德守)는 차양반, 이차하(李次夏)[1900~1973]는 셋째 양반, 박인로(朴仁路)는 종가 도령, 박상도(朴庠道)는 할미 역, 안명룡(安明龍)은 상쇠를 맡았다.
들놀음이라 불리는 야류(野遊)는 낙동강 서쪽의 「가락 오광대」와 더불어 낙동강 남부 일대에서 성행하던 민속 가면극이다. 이 가운데 「수영 야류」는 「동래 야류」와 더불어 부산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민속극이었다. 하지만 개화기 이후 밀어닥친 외래 사조와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으로 「수영 야류」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특히 1935년 이후 일제가 집단적 집회를 금지하면서 「수영 야류」의 전승은 단절되었고, 그 계승자들은 각자 생업에 종사하며 일제 강점기 말을 보내야 하였다. 이들이 「수영 야류」를 재현하는 일은 일제의 지배가 끝나고서야 가능하였다.
이후 조두영은 여러 차례에 걸친 「수영 야류」 공연을 통해 단절된 「수영 야류」의 복원과 전승에 주력하였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 「수영 야류」에 대한 연구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수영 야류」의 원로들로부터 이야기를 수집하고 대사를 모아 발표하는 등의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때 조두영은 최한복, 조재준 등과 함께 구술 및 증언을 함으로써 1963년 4개 과장으로 구성된 「수영 야류」 전 과장의 대사와 탈 및 연기 등이 완성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특히 양반 과장, 영노 과장, 할미·영감 과장, 사자무 과장 등 4개 과장 가운데 수영 백산(白山)에서 연유한 사자무 과장과 반인반수(半人半獸)의 괴물인 영노가 양반을 기어이 잡아먹어, 양반에 대한 극단적인 반항을 표현한 내용은 「수영 야류」만이 지닌 특징이었다. 이러한 「수영 야류」의 원형이 비교적 옛 모습을 유지하면서 전승되고 재현된 데는 이 같은 토박이 수영 사람들의 공동체 의식이 크게 작용하였다.
조두영은 「수영 야류」의 놀이꾼 가운데 말뚝이 춤의 명인이었다. 말뚝이[또는 막득이]는 파리하고 나약한 백면서생(白面書生)인 양반과는 대조적으로, 완력이 세고 정력이 강한 젊은이로 형상화되었다. 이는 말뚝이가 양반의 이면(裏面)을 폭로하는 등의 방식으로 양반층의 무능과 허세를 조롱하는 배역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대사에서 수양반의 대부인 마누라와 간통하였음을 폭로하는 것처럼, 말뚝이는 조선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는 내용을 연극적으로 녹여내는 역할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말뚝이 역은 양반 역과 함께 「수영 야류」 놀이꾼 가운데 재담과 춤의 기량이 가장 뛰어난 인물이 맡아 하게 마련이었다.
이 외에 조두영은 후진 양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수영 야류」에 기여한 바가 컸다. 뒤에 「수영 야류」의 기·예능 보유자가 된 정시덕(鄭時德)[1894~1974, 수양반 역]과 조재준[말뚝이 역], 태명준[수양반 역], 노영규(盧泳奎)[1919~1978, 양반 역] 등이 조두영의 지도로 「수영 야류」의 명인이 되었다. 「수영 야류」의 원로이자 복원과 전승에 헌신한 조두영은 1964년 향년 72세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