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5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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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在俊 |
영어음역 | Jo Jaejun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성로 43[수영동 229-1]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종세 |
[정의]
부산 수영야류(수영들놀음)의 말뚝이역 기예능 보유자
[가계]
조재준은 1906년 5월 6일 부산시 수영구 수영동에서 태어났다. 수영야류의 악사 기예능 보유자인 조복준(趙福俊)[1920~1966]의 친형이고, 수영야류의 복원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말뚝이 춤의 명인 조두영(趙斗榮)[1892~1964]은 조재준의 일가 숙부이다. 조두영의 장남으로 수영 탈 제작의 기예능 보유자인 조덕주(趙德周)[ 1914~1983], 조두영의 차남으로 말뚝이 역을 맡아 기예능 보유자 후보가 된 조덕칠(趙德七)[1932~1995]은 모두 조재준의 일가 종형제(從兄弟)이다. 또한 수영야류의 영감역 예능 보유자인 조홍복(趙弘福)[1933~2023]도 조재준의 재종형제(再從兄弟)이다. 이들은 대대로 부산시 수영구 수영동에 있는 수영성 북문 일대에 거주하면서, 수영성 동문 일대의 태씨(太氏) 일가와 함께 수영야류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활동 사항]
조재준은 어려서 조두영에게 수영야류 탈놀이를 배웠다. 들놀음이라 불리는 야류(野遊)는 낙동강 서쪽의 오광대와 더불어 낙동강 남부 일대의 민속가면극으로, 수영야류는 동래야류와 더불어 부산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민속극이었다. 하지만 1935년 이후 일제가 집단적 집회를 금지하면서 수영야류의 전승은 단절되었고, 수영야류의 계승자들은 각자 생업에 종사하며 일제 말기를 보내야 했다. 이런 이들이 수영야류를 재현하는 것은 일제의 지배가 끝나고서야 가능했다.
해방이 된 이듬해인 1946년 정월에 수영초등학교에서는 수영야류를 재현하는 공연이 벌어졌다. 이 날의 재현에는 조두영, 최한복(崔漢福)[1885~1968], 태명준(太命俊)[1906~1979] 등 수영야류의 전승자들을 중심으로 강덕수, 이차하, 박인로, 박상도, 안명룡 등이 참여하였다. 이후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수영야류에 관심을 가진 연구자를 중심으로 수영야류의 복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수영야류의 원로들로부터 이야기를 수집하고 대사를 모아 발표하는 등의 작업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때 조재준은 조두영, 최한복 등과 함께 구술 및 증언에 참여함으로써, 1963년 4개의 과장으로 구성된 수영야류의 전 과장의 대사, 탈, 연기 등이 완성되는 데 기여했던 것이다.
특히 양반과장, 영노과장, 할미영감과장, 사자무과장 등 4개의 과장 가운데 수영의 백산에서 연유한 사자무과장과 반인반수의 괴물 영노가 양반을 기어이 잡아먹어 양반에 대한 극단적인 반항을 표현한 내용은 수영야류 만이 지닌 특징이다. 이러한 수영야류의 원형이 비교적 옛 모습을 유지하면서 전승되고 재현된 데는 이 같은 토박이 수영 사람들의 공동체 의식이 크게 작용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노력 끝에 1972년 2월 26일 수영야류는 국가 무형 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었다. 수영야류에서 조재준은 그에게 수영야류를 가르친 조두영과 마찬가지로 말뚝이 역을 맡아 공연했는데, 말뚝이 역은 수양반 역과 더불어 수영야류에서 재담과 춤의 기량이 가장 뛰어난 인물이 맡는 배역이었다. 말뚝이(또는 막득이)는 파리하고 나약한 백면서생(白面書生)인 양반과는 대조적으로, 완력이 세고 정력이 강한 젊은이로 형상화되었다. 이는 말뚝이가 양반의 이면(裏面)을 폭로하는 등의 방식으로 양반층의 무능과 허세를 조롱하는 배역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대사에서 수양반의 대부인 마누라와 간통하였음을 폭로하는 것처럼, 말뚝이는 조선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는 내용을 연극적으로 녹여내는 역할이었던 것이다.
이에 1972년 수영야류가 국가 무형 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될 때 조재준은 기예능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974년 6월 4일 조재준은 향연 6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2년 2월 26일 수영야류 말뚝이역 기예능 보유자로 인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