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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706
한자 盧泳奎
영어음역 No Yeonggyu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성로 43[수영동 229-1]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종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예술인
성별
대표경력 「수영 야류」 양반 역 기·예능 보유자
출생 시기/일시 1919년 10월 15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33년 - 수영보통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40년 - 「수영 야류」 전수받음
활동 시기/일시 1963년 - 수영야류민속예술보존회 창립
활동 시기/일시 1976년 6월 18일연표보기 - 「수영 야류」 양반 역 기·예능 보유자 인정
몰년 시기/일시 1978년 1월 22일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노영규 출생지 - 부산광역시
거주|이주지 노영규 거주지 -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학교|수학지 수영공립보통학교 - 부산광역시 수영구 광안 1동 71
활동지 수영야류민속예술보존회 -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지도보기

[정의]

현대 부산 「수영 야류」의 양반 역 기·예능 보유자.

[활동 사항]

노영규(盧泳奎)는 1919년 10월 15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수영공립보통학교[현 수영초등학교]에 입학해 1933년 졸업한 것으로 여겨진다. 들놀음이라 불리는 야류(野遊)는 낙동강 서쪽의 「가락 오광대」와 더불어 낙동강 남부 일대에서 성행하던 민속 가면극으로, 이 가운데 「수영 야류」[「수영 들놀음」]는 「동래 야류」와 더불어 부산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민속극이었다.

하지만 개화기 이후 밀어닥친 외래 사조와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으로 「수영 야류」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수영 야류」의 맥이 끊어질 뻔하던 1940년경에 노영규「수영 야류」와 인연을 맺었다. 「수영 야류」의 최고 원로인 최한복(崔漢福)[1885~1968]과 조두영(趙斗榮)[1892~1964]에게 「수영 야류」를 배운 것이다.

해방 이후 「수영 야류」의 재현과 복원을 주도한 이들이 노영규의 스승인 최한복조두영, 태명준(太命俊)[1906~1979] 등 수영 토박이들이었다. 그 결과 1963년 양반 과장, 영노 과장, 할미·영감 과장, 사자무 과장으로 구성된 「수영 야류」 4개 과장의 대사와 탈 및 연기 등이 복원되었다. 나아가 1972년 「수영 야류」는 국가 무형 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노영규는 이들에 의해 「수영 야류」가 복원되는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춤꾼으로 성장하였다.

이에 노영규는 스승들을 이어 「수영 야류」의 보존을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수영 야류」에서 노영규가 맡은 배역은 양반 역이었는데, 양반 역은 말뚝이 역과 더불어 「수영 야류」의 놀이꾼 가운데서도 재담과 춤 솜씨가 특별히 뛰어난 이들이 맡았다. 특히 1963년 노영규「수영 야류」의 전승을 위한 구심으로 수영 야류민속예술보존회를 창립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이후 수영 야류민속예술보존회의 창립 회원으로 「수영 야류」를 보존하고 전승하는 일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뛰어난 기량과 헌신성을 인정받았다. 노영규는 1978년 1월 22일 5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노영규는 1976년 「수영 야류」의 양반 역 기·예능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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