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이케다 스케타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177
한자 池田佐忠
영어음역 ikeda sukatada
이칭/별칭 지전좌충(池田佐忠)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서구 토성동 2가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전성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경제인
성별
대표경력 부산임항철도주식회사 사장
출생 시기/일시 1885년 8월 25일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899년 - 대총문장(大塚文章)의 한문숙(漢文塾) 및 명치중학교에서 수학
활동 시기/일시 1912년 - 경상북도 대구헌병대 적성파견소 근무
활동 시기/일시 1916년 12월 - 경상북도 문경군을 기점으로 식림과 개간 간척 사업에 종사
활동 시기/일시 1918년 - 김천-안동 간 철도 건설을 위한 조선산업철도기성동맹회 회장으로 추천받아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지전합명회사 대표로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26년 - 부산축항합자회사 사장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35년 - 부산창고주식회사 설립, 사장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38년 - 부산축항주식회사 사장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39년 - 부산임항철도주식회사 사장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부산일본인세화인회 회장에 취임
몰년 시기/일시 1952년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일본 구마모토 현 천초군 하포촌[日本 熊本縣 天草郡 下浦村] 1077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서구 토성동 2가
활동지 부산축항주식회사 - 부산광역시 중구 충무동 4가[구 부산부 소화통 3정목 102]
활동지 부산임항철도주식회사 - 부산광역시 중구 충무동 4가[구 부산부 소화통 4정목 10-2]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 항만 매축으로 성장한 일본인 실업계 거두.

[가계]

이케다 스케타다[池田佐忠]는 1885년 8월 25일 일본 구마모토 현 천초군 하포촌[日本 熊本縣 天草郡 下浦村] 1077번지에서 지전우언(池田友彦)과 지전리오(池田リヲ)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내는 지전코메(池田小梅)이다.

[활동 사항]

이케다 스케타다는 1899년 3월 소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동향의 대총문장(大塚文章)의 한문숙(漢文塾)과 명치중학교의 교외생을 거쳐, 1901년 4월 농업에 종사하였다. 1905년 12월 현역병으로 구마모토 보병 제13연대에 입대하였고, 이어 헌병으로 전과한 후 만주의 봉천과 히로시마 현[廣島縣] 충해정(忠海町)을 거쳐, 1912년 조선으로 건너와 경상북도 대구헌병대 적성파견소에서 근무하면서 조선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14년 조선총독부 경부 겸임을 명받았고 헌병 군조에 임명되었다. 1916년 문경분견소에서 근무한 후, 이를 끝으로 육군을 만기 제대하고 조선의 경제계에 투신하였다.

이케다 스케타다는 1916년 12월부터 경상북도 문경군을 기점으로 식림과 개간 간척 사업에 종사했으며, 1918년 김천-안동 간 철도 건설을 위한 조선산업철도기성동맹회 회장으로 추천받아 활동하였다. 1920년 자본금 10만 원의 지전합명회사를 설립하고 경상북도 대구부와 김천읍을 기점으로 승합자동차 운수업을 경영하였다. 이후 조선개척주식회사, 경북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주로 경상북도에서 운수업에 종사했으며, 조선 농사 개선을 목표로 거대 농사 회사를 창립하기 위해 동양척식주식회사[일명 동척] 등의 찬동을 얻어 교섭 중이었으나 관동 대지진으로 중지되었다. 이후 매축과 매립 등에 뜻을 두기 시작하여 점차 부산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케다 스케타다는 먼저 경상남도 통영항 개수, 목포부 역전 매립, 인천항 개수, 원산부 지선 매립 등의 계획을 수립하여 일부 완성하는 등 각종 매축과 매립 활동에 진력하였다. 1926년에는 부산의 남항 수축 사업이 오랜 현안임을 듣고 비도문길(飛島文吉)의 비도조(飛島組)와 제휴하여 부산축항합자회사를 창립하고 사장이 되어 남항 수축 공사에 착수하였다. 1931년까지 제1 방파제를 비롯하여 제2 방파제를 준공하고 이어서 약 49만 5867.77㎡[15만 평]을 4기에 나눠 매립하였다. 1931년 부산 중심가와 영도의 연결 교통을 완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부산 대교 건설을 계획하고 출원하여 당국의 인가를 얻었으나 부산부가 국비로 시공하고자 하여 설계 서류 모두를 부산부에 양도하였다.

1934년 부산 적기만 수축 사업을 계획하고 제1차 사업으로 39만 6694.26㎡[약 12만 평]의 매립권을 고베 시에 거주하는 중촌준책(中村準策)으로부터 양도받아 공사에 착공하여 1937년 5월에 완공하였다. 1935년 자본금 10만 원의 부산창고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이 되었다. 1937년 적기만 제2차 수축 사업으로 약 6만 6115.70㎡[2만 평]의 매립 면허를 받아 1940년 2월 완성하였다. 1938년 부산축항주식회사로 조직을 정비하고 사장이 되었고 다시 조선축항주식회사로 개칭하였다.

1939년 적기만 수축에 따른 부두 지대 조성을 위해 약 9만 9173.55㎡[3만 평]의 매립 면허를 받아 완공하였다. 적기만 수축과 동시에 선차 연락 계획을 수립하여 임항 철도를 기획하고 1939년 면허를 받아 이를 기초로 자본금 810만 원의 부산임항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이 되었다. 면허 지령서에 의하면 부산진역부터 적기역까지 연장 6,120m이며, 운전 개시일은 1941년 11월 1일이었다. 이후 적기만은 물론 울산 공업 지대 건설 사업에도 관여했으나 해방과 함께 수포로 돌아갔다. 해방과 더불어 부산일본인세화인회(釜山日本人世話人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서 일본인의 귀환과 원호에 힘쓰다가 1945년 10월 30일 일본으로 돌아갔다.

[상훈과 추모]

1935년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 표창을 받았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