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464 |
---|---|
한자 | 赤崎灣强制勞務動員 |
영어의미역 | Forced Labor Mobilization in Jeokgi Bay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남구 우암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전성현 |
[정의]
일제 강점기에 부산의 적기만에서 인력을 강제로 동원한 사건.
[역사적 배경]
전시 체제 아래 항만 건설 및 하역 노무 동원과 관련해 경상남도의 대부분의 항구 도시에서 강제 동원이 진행되었다. 특히 군사 도시인 진해는 물론 조선의 대표적인 항구인 부산을 위시하여 마산 등은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전쟁 발발과 함께 대륙 병참 기지로서의 역할이 강화된 부산의 경우, 군사적 목적 하에 일본군에 의해 항만의 개발과 이용이 추진되었는데, 대표적인 곳으로 적기만을 들 수 있다.
[경과]
적기만 매립은 원래 부산진매축회사가 조선총독부로부터 인가받았던 사업인데, 1930년 당시 남항 매축 사업을 진행하던 ‘조선의 매축왕’ 이케다 사다오[池田佐忠]가 적기만 매립을 계획하고 1931년 부산진매축회사로부터 약 35만 410㎡의 매립권을 양도받았다. 1934년 4월 범일정에서부터 매립에 착수하여 1944년 12월까지 약 10년 9개월간 3차에 걸쳐 매립을 진행하였다. 1942년에는 적기 부두를 연간 60만 톤의 물동량을 가진 부산의 보조항으로 만들려는 이케다와 동척의 계획에 조선군의 특별한 요청까지 더해져 ‘유사시 군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항만이 개발되었다. 이 때문에 적기만에는 실제로 아카츠키[曉] 부대라는 육군 선박 수송 부대가 주둔하여 군수품을 취급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 적기만에 동원된 사람들은 부산 지역은 물론 경상남도 의령군, 산청군, 진주시 등에서 차출되어 고향 마을로부터 도보로 인근의 철도역에 모여 다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들어왔다. 기초 자료에 의하면 이들의 연령은 50대에서 10대까지 다양했던 것으로 나타나지만, 주로 10대 후반에서 20대였다.
1944년 12월까지 매립 공사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항만 매립과 부수적인 매립지 정비 작업에 동원되었다. 예를 들어, 매립된 지역의 터를 닦거나 도로 개설에 필요한 공사에 동원되거나 당시 추진하고 있던 임항 철도 건설에 종사했으며, 어느 정도 기술이 있을 경우 콘크리트를 타설하는 일에도 종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적기만은 군수품을 취급하는 군부대가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적의 공격에 방어할 수 있는 반공호 건설은 물론 군수품을 적재하기 위한 군수 기지 확장 공사에도 종사하였다. 또한 군부대에서도 각종 작업과 하역 업무를 담당하여 콩이나 곡류 등의 군량미나 목재, 무기, 화약 등을 수송하였다.
적기만 매립은 공업지로도 계획되었기 때문에 1차 매립 이후 각종 유류 탱크는 물론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조선운송주식회사 등 국책 회사를 비롯하여 미쓰이물산주식회사, 일본광업주식회사 등 유력 기업, 회사, 공장 등 30여 개가 진출하였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 말 대부분 군수 공장으로 활용되었고, 강제 동원된 사람들이 이들 군수 공장에서도 노역하였다.
[결과]
동원된 이들의 노동 실태는 아침부터 저녁 7시까지 노무에 종사해야 했으며 휴일은 없었다고 한다. 외부와의 서신 교환은 허락되지 않았으며 숙소는 임시 거처 또는 창고를 개조한 곳에서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이불하나만 덮고 생활하였다. 식사는 주먹밥이 다였으며 연합군의 공습이 진행되면 노무자들은 반공호로 대피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적기만은 귀환 동포들을 수용하는 곳으로 이용되었으며 6·25 전쟁 시기에는 피난민들의 수용소로 이용되어 7만 명의 피난민을 수용하였다.
[의의와 평가]
적기만 매립지는 부산광역시에 소재한 강제 노무 동원 현장 중 몇 안 되는 곳으로,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삼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