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169
한자 金壘關-
영어의미역 Site of Geumrugwa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터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690-5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나동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성곽|문루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72년 6월 26일 - 부산진지성,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
소재지 금루관 터 -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690-5

[정의]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있는 조선 후기 부산진성의 서문 터.

[개설]

『조선왕조실록』 중 1607년(선조 40) 6월 20일 경상도관찰사 정사호(鄭賜湖)의 치계에 "예전부터 왜관과 부산진성은 한 성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평시 부산진성은 서쪽에 있고 왜관은 동쪽 5리쯤에 있었습니다. 지금의 부산진은 왜인이 쌓은 성을 왜관의 옛터 옆으로 이설하였으니 곧 동쪽입니다[自前倭館與釜山 非在一城中者也 平時 釜山在西辺 倭館在東辺五里許 今則釜山鎭 就倭子所築之城 移設於倭館舊基之傍 卽東邊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를 통해 볼 때 임진왜란이 끝난 후 예전의 부산진성[조선 전기 부산진성 또는 구 부산진성]이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허물어져 없어졌기 때문에 조선 수군은 구 부산진성의 동쪽 옛 부산포왜관의 근처에 축조된 자성대왜성부산진성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남진지(嶺南鎭誌)』[1895]에 수록된 「부산진지(釜山鎭誌)」 ‘성첩(城堞)’조에 부산진성의 둘레는 1,108보(步)[1보를 6척으로 계산할 경우 6,648척], 성가퀴는 487토(吐)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문’조에는 동문을 진동문(鎭東門), 서문을 금루관(金壘關), 남문을 진남문(鎭南門), 북문을 구장루(龜藏樓), 암문(暗門)은 교상각(橋上閣)이라 하여 서문에 금루관이란 문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문 좌우 우주석(隅柱石)[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9호]에는 "이곳은 나라의 목에 해당하는 남쪽 요충이요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로 해석하고 있는 각각 ‘남요인후(南徼咽喉) 서문쇄약(西門鎖鑰)’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남요인후’ 라 새겨진 돌기둥 아래 면에 ‘임신하(壬申夏)’라고 새겨져 있어 부산진성자성대왜성으로 옮기고 난 후인 1632년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영문(營門)’조에 “본진은 남쪽 변방의 인후로서 대마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킬 만한 곳이다. 일본의 배가 돛을 걸고 출입하게 되면 삼영(三營)에 일일이 보고하는데 성화(星火)보다 급하다. 막중한 변정(邊情)에 한 글자라도 혹 차질이 생기면 양국 간에 즉시 분란이 생길 것이니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부산진성이 국방의 중요한 곳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 돌기둥은 일제 강점기 서문이 헐리면서 인근 성남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져 보관되었던 것을 1975년 지금의 자리에 서문과 문루인 금루관을 복원하였다.

[위치]

금루관 터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243번지 경부선 철도 인근에 위치한다.

[현황]

서문과 서문의 문루인 금루관은 1975년 현재의 위치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촬영된 서문 사진을 보면 서문의 성벽과 명문이 있는 성벽 경사에 맞춰 우주석이 비스듬히 눕혀져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부산진성은 이전의 자성대왜성의 성벽을 그대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우주석도 성벽의 경사에 맞추어 수리하였고 문루와 여장만 조선식으로 개축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부산진성은 1972년 6월 26일 ‘부산진지성(釜山鎭支城)’이란 이름으로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자성대 공원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동문과 서문이 복원되었고, 산 정상부에는 진남대라는 장대가 복원되었다. 2020년 부산진성으로 명칭이 개정되면서 서문 우주석도 ‘부산진지성 서문 우주석’에서 ‘부산진성 서문성곽우주석’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전기 증산 아래 있던 부산진성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자성대왜성으로 이전하여 부산진성으로 사용하였다. 서문 우주석의 명문을 통해 부산진성이 조선 후기 부산 지역 해안방어의 중심 수군진성임을 알 수 있으며, 일제 강점기에 촬영한 서문의 모습을 통해 조선 측에서 왜성을 이용한 대표적인 사례로서 주목되는 유적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1.07.26 수정 내용 수정
2021.06.10 수정 [개설], [위치], [현황] 내용 수정 및 추가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