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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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局泰 |
영어음역 | Gim Kuktai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이귀원 |
[정의]
일제 강점기와 현대 부산 출신의 사회 운동가이자 관료, 정치인, 경제인.
[개설]
김국태(金局泰)는 1887년(고종 24) 부산진 수정동[현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의 유력 유지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1920년대 부산 지역 민족주의 운동 지도자로 활동하여 부산청년회 간사장, 신간회 부산지회 초대 회장 등 많은 민족 운동 단체에서 간부로 활동하였다. 또한 광산업, 운수업에도 종사하였던 김국태는 해방 직후 미군정청 경상남도 경찰국장에 임명되고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1948년, 1950년 총선거에서 연거푸 낙선하여 실의 속에 삶을 마감하였다.
[활동 사항]
김국태는 개성학교 중등부를 졸업하고 문상우(文尙宇)와 함께 일본 동경고등상업학교에 유학하였다. 유학 중 대한학회 평의원과 회계부, 사찰부 부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문상우, 윤정하와 함께 월간 상업 잡지 『상학계(商學界)』를 창간하였다. 1911년에 동경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5월 31일 부산부 부서기(府書記)가 되었다. 1918년에는 대구은행 지배인에 취임하였다.
1919년 12월 부산 지역 자본가들이 창립한 시민 단체 부산예월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이후 부산청년회 간사장에 선출되어 1920년대 부산 지역 민족주의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3년 민립 대학 설립 운동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물산 장려 운동의 열기 속에 부산에서 창립한 소비절약토산장려선전회 회장, 부산금주동맹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또한 자신이 태어난 수정동에서 수정강습회, 수정체육회를 설립하였다.
언론 운동에도 참여하여 1924년에 『시대 일보』 부산지국장을 맡았으며, 그 해 4월 5일에 창립한 부산기자단 간사로 선출되었다. 당시 친일화한 종교 단체 보천교가 『시대 일보』를 인수하려 하자, 이를 저지하는 데 앞장섰다. 이 무렵 일제가 조선인 노동자의 일본 입국을 가로막고 친일 단체 상애회가 취업을 미끼로 노동자를 갈취하여 분노의 여론이 들끓자, 1924년 5월 17일 도항 저지 철폐 및 상애회 박멸 부산 시민대회가 열리자 이때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노동자의 일본 도항 길을 터주었다.
한편, 부산의 민족주의자들은 1924년부터 부산에 공립부산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남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청원 노력을 기울여 오다가, 1926년 2월 23일 부산 청년 연맹 회관에서 공립부산여자고등보통학교기성회를 설립하였는데, 이때 김국태는 기성회를 대표하는 전무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때 학교 설립 기금을 마련하는 데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1884년에 설립된 수정장학계의 재산이었다. 김국태의 할아버지 김유갑이 기부한 임야 3만 3057.85㎡[1만여 평]을 큰 재정 기반으로 하고 있던 이 장학계는 일찍이 여자 고등 보통학교 설립에 재산을 기부하기로 하였으나, 일부 분식파(分食派)가 이를 거부함으로써 지역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김국태는 수정장학계 문제를 해결하면서 1927년 공립부산여자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 1927년 7월 30일에 신간회 부산지회가 창립되자 초대 회장에 올랐으며, 1930년 1월에는 부산양말직공조합 집행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경제 활동에도 열성을 보여, 1929년 11월 20일에 구포면 만덕리에 만덕금광조합을 설립하고 195만 1735.54㎡[59만 400평]에 대해 광업권을 설정, 12월 5일부터 광업에 착수하고, 1932년 1월 6일에는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면의 광산을 인수, 광천면 내죽리 449번지에 구만리 금산사무소(九萬里金山事務所)를 설치하여 1932년 7월 5일부터 광업에 착수하였다. 1932년 12월 10일 구포에 자본금 8,000원의 합자 회사인 환일자동차부(丸一自動車部)를 설립하여 구포-부산 간 화물 자동차 영업을 개시하였으며, 1937년 6월 24일 자본금 20만 원의 남조선광업주식회사[본점 부산광역시 중구 보수동]를 창립하였다.
해방이 되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남연합대회 회장을 맡았으며, 1945년 9월 각당통일기성회 설립에 참여하여 교섭부 부원으로 활동하였다. 미군정이 실시되자 미군정청 경상남도 경찰국장을 맡았다. 나아가 1946년 10월 31일에는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경상남도 민선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해 12월 12일에 입법 의원이 개원하자 재정 경제 위원, 운수 체신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5·10 총선거 때에는 부산 을구에 출마하였으나 한민당으로 출마한 허정(許政)에 밀려 아깝게 차점으로 낙선하였다[허정 2만 1390표, 김국태 2만 719표]. 선거 후 부정 선거라며 선거 무효 소청을 제기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해 10월 신익희(申翼熙)가 이끄는 대한국민당 창립 준비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50년 5·30 총선거에서 부산 을구에 국민회 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장건상(張建相)에 큰 표 차로 밀려 차점 낙선하였다[장건상 2만 6720표, 김국태 5644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