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3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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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華明洞坡平尹氏世居地 |
영어의미역 | Daecheon-ri Papyeong Yun Clan Village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 대천리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백이성 |
[정의]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 대천리에 있는 파평 윤씨 세거지.
[개설]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고려 시대 공신 윤신달(尹莘達)을 시조로 하며, 조선 숙종(肅宗) 때 여진을 징벌한 윤관(尹瓘)의 후손으로 파평을 본관으로 전래된 문중이다. 파평 윤씨는 고려조에서 조선조까지 문과 급제자 418명, 정승 11명을 배출한 명문거족이다.
[명칭 유래]
대천리(大川里)란 대천(大川) 유역에 형성된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천은 하상이 넓어 ‘큰내’로 부르다가 한자 이름인 ‘대천’으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형성 및 변천]
파평 윤씨가 북구 화명동 대천리 마을에 들어온 것은, 조선 시대 병자호란 직후 성균관 진사였던 윤소(尹沼)가 청나라를 배척하는 데 앞장섰다가 양산[현 북구 화명동]으로 귀양을 오면서부터다. 윤소가 이곳 대천리 마을로 들어온 것은 옆 마을인 와석 마을에 장인인 임회(林檜)가 귀양을 와 10년[1613~1623] 동안 있으면서 그 후손들이 정착하여 살았기 때문이다. 이후 입향조 윤소의 아들 윤비의 산소를 화명동 강변의 용당 마을 안산에 정하면서 파평 윤씨들이 분산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윤소는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는데, 그런 영향 때문인지 후손들도 지역 향교를 운영하는 데 앞장서는 등 학문에만 전념하고 벼슬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화명동 파평 윤씨 문중 사람들은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명문 집안으로서 민족 학교 설립에 앞장서고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에 주동자로 참여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윤경(尹涇)이다. 또한 사립화명학교 설립 초대 교장을 역임한 윤대의(尹大儀), 사립화명학교 교장과 구포 면장을 역임한 윤종의(尹種儀)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자연 환경]
대천리 마을 북쪽에는 부산의 진산(鎭山)인 금정산(金井山)이 자리한다. 금정산에서 발원한 대천이 흘러내려 서쪽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대천에는 전설이 깃든 애기소 폭포와 웅덩이가 있다.
[현황]
2013년 현재 대천리 마을에 파평 윤씨 25가구가 살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 도시화가 진행되며 많은 변화 속에서도 아직도 윤씨 세거지로서의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