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3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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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堂甘洞坡平尹氏世居地 |
영어의미역 | Danggam-Dong Papyung Yun Family Line Village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류종현 |
[정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에 있는 파평 윤씨 세거지.
[개설]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명문 거족(名門巨族)으로, 조선 시대에도 많은 학자·정치가를 배출하고 왕비를 가장 많이 배출한 명문가이다. 아울러 그 세거지나 집성촌을 살펴보면 북한 지역은 물론이고 남한의 경기와 호남, 영남을 막론하고 두루 분포되어 있는 대성(大姓)이다.
[명칭 유래]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의하면, 당감동이란 이름은 일제 강점기인 1924년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당리(堂里)와 감물리(甘勿里) 두 마을을 합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은 원래 고무나무골이라 불렀는데, 마을 가운데 수령이 오래된 고사목(枯死木)이 있었는바 이를 중심으로 북쪽을 당리, 남쪽을 감물리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당리라는 이름은 오래된 당집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도 ‘영숙사(永肅祠)’라는 신당이 남아 있다. 감물리는 이 마을을 흐르던 검물내[神川, 神水]가 변한 이름이라는데, 지형적으로 보아 지금 부산천의 옛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형성 및 변천]
파평 윤씨 가운데 동래, 울산을 중심으로 세거한 문중은 대개 소정공파(昭靖公派)로, 장령(掌令)을 지낸 윤배(尹培)의 후손이 많다. 그중 부산으로 흘러 들어온 집안은 장령공의 아들로 현감을 지낸 윤사은(尹師殷)이며, 그 뒤 개성 유수 윤탁(尹倬), 동부승지 윤선지(尹先智)와 윤욱(尹昱), 윤필세(尹弼世), 윤정(尹炡)에 이르렀다.
윤정의 두 아들 중 윤언거(尹彦擧)는 예천으로 이거하였고, 윤헌거(尹憲擧)는 정묘호란 직후 동래 부곡으로 이거하였다. 그 뒤 윤헌거의 아들 윤문(尹捫)과 그 아들 윤장교(尹長敎)가 당감동에 정착하며 입향조가 되었는데, 그 시기는 1800년 전후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50여 년 뒤 화명동과 감천동 등지로 흩어져 1904년에 발간된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에도 흔적이 없고 족보에도 모두 누락되었다.
[자연 환경]
당감동 서북쪽은 금정산맥이 지나가는 산지로, 이 지역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산지의 동쪽 산록에서 발원한 소하천은 동천의 상류로 동남쪽으로 흘러 동천으로 유입한다.
[현황]
2000년 인구 조사에서는 당감동에 파평 윤씨 약 6,200여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으나 2013년 현재는 10여 가구만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