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407 |
---|---|
한자 | 菉山洞坡平尹氏世居地 |
영어의미역 | Noksan-dong Papyeong Yun Ancestral Village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산양 마을|녹산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상기 |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에 있는 파평 윤씨 세거지.
[개설]
파평 윤씨(坡平尹氏)의 시조는 윤신달(尹莘達)이다. 윤신달은 고려 태조인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워 삼한 벽상 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올랐다. 『조선 씨족 통보(朝鮮氏族統譜)』와 『용연 보감(龍淵寶鑑)』 등의 문헌에 따르면, 윤신달은 파주 파평산 기슭에 있는 용연지라는 연못 가운데에 있던 옥함(玉函) 속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윤신달이 태어날 때 겨드랑이에 81개의 비늘과 발에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고, 손바닥에는 윤(尹)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성을 ‘윤’으로 하였다고 전한다.
윤신달은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기여한 공으로 벽상 삼한 익찬 이등 공신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의 관작을 받아 후손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파평(坡平)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녹산(菉山) 마을과 산양(山陽) 마을은 김해 김씨(金海金氏)와 파평 윤씨, 밀양 손씨(密陽孫氏)가 1670년경에 입향하여 집성촌을 이루며 약 400년의 역사를 간직한 마을이다.
[명칭 유래]
산양 마을의 옛 이름은 이곶(伊串)으로 이꼬지라 불렀고, 산을 등지고 있는 양지바른 곳이기 때문에 ‘산양’이란 이름이 생겨났다. 녹산 마을은 원래는 ‘사슴 녹(鹿)’ 자를 쓰는 녹산(鹿山)이었다. 즉, 굶주린 한 마리 사슴이 푸른 들을 향해 내리뛰는 모습의 기록 주야형(飢鹿走野形)의 명당자리라 하여 녹산이라고 한 것이다.
[형성 및 변천]
강서구 녹산동 지역으로 온 사직공파(司直公波)는 시조 윤신달의 2세 윤선지(尹先之)가 삼한 벽상 공신이 되었고, 3세 윤금강(尹金剛)이 상서성 좌복야(尙書省左僕射)가 되었으며, 4세 윤집형(尹執衡)은 검교 소부 소감(檢校少府少監)이 되었다.
그리고 5세 문경공(文敬公) 윤관(尹瓘)은 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수태보 문하시중(守太保門下侍中) 판상서이부병형부사(判尙書吏部兵刑府使) 지군국중사(地軍國重事) 감수국사(監修國史)를 지낸 고려 명장이며, 세조 때의 18세 사직공(司直公) 윤사건(尹師騫)을 파조로 하여 19세 윤연(尹硏)은 성종 때 충좌위(忠佐衛) 사맹(司猛)을 하였다.
또한 20세 윤진종(尹震宗)은 사직(司直)을 거쳐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고, 21세 윤언충(尹彦忠)은 회덕 현감(懷德縣監)과 인동 부사(仁同府使)를 하였으며, 22세 윤종(尹鐘)은 사직·양양 부사(襄陽府使)·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역임하여 고려 시대에 이어 조선 시대까지 대를 이어 관계(官界)에 공을 세운 명문 집안이다.
녹산동 파평 윤씨는 1680년경 함안에서 녹산으로 이거해 온 25세 윤이하(尹而夏)를 향시조로 330여 년간 녹산 지역에 세거하였다. 이후 인근의 산양 마을로 이거하였다. 30세 윤찬극(尹瓚極)의 부인 박소임(朴小任)은 병중의 남편을 희생정신으로 지극히 간호하여 나라에서 열녀 정려를 받았고, 윤찬극의 아들 31세 윤규석(尹奎錫)은 김해사립녹명학교를 세워 초대 교장을 역임한 교육가이며, 윤규석의 손자 33세 고산(孤山) 윤병태(尹炳太)는 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부산강서문화원을 창립 개원하여 초대 원장을 지냈다.
산양 마을의 도남(陶南) 윤종근(尹鍾根)은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STX의 전신(前身)인 대동조선(大東造船)과 흥아해운(興亞海運)을 창업하여 부산 해운업계의 대부로 활약하였으며, 후학을 위해 녹산중학교(菉山中學校) 재단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지역 발전에 공헌하였다.
[자연 환경]
강서구 녹산동은 동쪽으로 서낙동강과 접해 있으며, 북쪽에 위치한 봉화산 일대의 산지를 제외하고는 서낙동강의 퇴적 작용으로 이루어진 평야 지역이다. 서낙동강 하구에는 노적봉[서낙동강 하구의 기반암으로 이루어진 작은 섬으로 임진왜란 때 왜군이 쳐들어오자, 섬 전체를 짚으로 덮어 노적더미처럼 위장하였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 있다.
[현황]
녹산동 파평 윤씨 세거지는 한창 번창할 때 녹산 마을과 산양 마을에 30~40가구가 살았으나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나가면서 2013년 현재 산양 마을에 3가구, 녹산 마을에 18가구가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