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5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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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龜浦場 |
영어의미역 | Gupo Mart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시장길 21[구포동 589-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연지 |
[정의]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에서 열리는 조선 후기에 개설된 오일장.
[개설]
장시는 상인들과 일반인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물화의 교역장이다. 지방의 장시는 월 6회씩 5일 간격으로 개시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장시의 발달은 국지적인 시장권 형성과 함께 각도를 넘어서서 전국적으로 지역 간 물화 유통의 발달을 가져왔다. 구포는 낙동강 하류 수로의 변화에 따라 구포~사상~하단을 연결하는 흐름이 낙동강의 본류를 이루고, 주변에 삼랑창(三浪倉)·감동창(甘同倉) 등 조창을 끼고 있어서 포구로서 육상과 수운의 교통 요충지라는 이점으로 인해 화물의 집산과 교역지로 발달하였고, 이에 따라 구포장(龜浦場)에서는 포목, 석유, 소금, 명태 등 다양한 상품이 취급되었다.
[명칭 유래]
구포의 옛 지명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구(龜)를 ‘갑우’ 또는 ‘거뵈’로 보아 ‘거뵈개’라는 설과 구를 검(神)으로 해석하여 ‘굿개’라는 설이 있다.
[형성 및 변천]
역사적으로 구포장의 명칭이 등장하는 것은 1871년에 간행된 『영남 읍지(嶺南邑誌)』로 3·8일 장으로 열렸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그 이전에 장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구포장은 동래읍내장, 부산장, 독지장과 함께 동래의 오일장 체계에 속해 있었다. 1905년에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 부산에서 내륙으로 운송될 화물은 구포와 하단에서 집산되었으나, 낙동강 하류의 수로 변화로 인해 하단보다 구포가 포구 기능이 원활하였다. 1914년에 대화재로 이재민이 발생하여 장터의 재건을 위해 구포 주민들이 의연금을 각출하였다. 또한 낙동강이 범람하여 시장이 침수되기도 하였는데, 1932년에 낙동강 제방 축조 시 현재의 위치로 시장을 옮겼다. 장터에는 목조 건물과 노점이 들어서 상설 시장이 되었으며, 현재는 ‘정이 있는 구포 시장’이란 현대 시장으로 발전하였으나 3일, 8일 장날은 오늘날에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구포장은 낙동강 선창에서 감동창을 끼고 큰 마당과 골목길에 형성되었다. 현재는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시장길 21번에서 장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