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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3639
한자 舞踊
영어의미역 Dance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영미

[정의]

부산광역시에서 인간 내부의 미적인 정서를 육체를 빌어 율동적으로 표현하는 예술.

[개설]

무용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표현 수단으로 모든 예술의 시원(始原)이 된다. 그 이유는 무용이 내적 경험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물질이나 돌, 언어 등을 사용하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몸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시대가 변하고 인간의 예지가 발달함에 따라 다양한 생활상이 전개되고 동시에 무용도 점차 육체를 통해 우아하고 조화된 형태로 표현되게 되었다.

우리 무용은 상고 시대 제천 의식에서 비롯되었으며 이것이 우리 무용의 원초 형태라 할 수 있다. 한국 무용은 삼국 시대 이전의 원시 시대의 무용, 고려 때의 예인 집단이 추던 무용, 조선조 중엽 이후 대중적 생활 문화가 발달한 시대의 오락적 무용과 예술적 무용으로 그 맥락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뿌리를 가진 한국의 무용은 지역적으로 역사적 배경, 그 고장의 방언, 풍습, 기호, 인성과 지식도 등의 차이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생성되고 변화 발전되어 왔다.

[부산 춤의 시작]

부산은 고대 김해 중심의 문화권과 조선 시대 이후 동래 중심의 문화권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부산 문화의 원뿌리는 금관가야(金官伽倻)를 중심으로 한 가야국이 바탕이 되었으며 악무는 가야금과 춤 그리고 노래로 이루어졌다. 이러하듯 가야국의 악무는 가야금과 융합되어 후대 신라 악무가 되었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악무를 함께 수용하여 이른바 통일 신라의 악, 가, 무를 창출하게 되었으며,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면서 부산 무용의 근간이 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부터 시작된 개혁 운동과 국권 강탈에 이르러 궁중 악원을 비롯하여 여기(女妓) 제도마저 폐지되어 궁중의 여령, 악공들과 지방 관아의 관기들도 함께 해체되는 시기를 맞았다. 1920년을 전후하여 일본 교방(敎坊)의 이름을 모방하여 권번(券番)으로 개칭한 기생 조합이 형성되었는데 부산에도 동래권번, 봉래권번, 부산권번이 생겨났으며 이것은 일제의 민족 문화 말살 정책 속에서도 우리의 전통적 가무악의 명맥을 이어 온 곳으로, 전통 연희 전승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권번 계열에서는 동래 출신의 박난정, 최계랑, 김해월 등이 가무에 능통하여 부산을 대표하였다.

부산에서는 동래 관아로 이입된 관기들의 춤인 「동래 고무」, 동래 검무와 당시의 장끼 춤인 「동래 학춤」, 굿거리 춤, 입춤과 마당 놀음으로 음력 정월 대보름날 밤에 행해졌던 「수영 야류」「동래 야류」, 정초에는 지신밟기와 줄다리기가 행해졌고, 여기에 해당하는 악기는 사물[꽹과리, 징, 북, 장고]이었다.

신무용[외국의 민속 무용]이 최초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920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유학생들이 고국을 방문하여 러시아의 민속 무용과 음악을 선보이면서 부터이다. 한국 최초로 코팍 댄스를 춘 배구자 이후 최승희에 의해 신흥 무용과 한국 무용을 접목하여 새로운 장르를 구축한 한국 무용의 또 다른 갈래가 선보였다. 이것은 신흥 무용 형태로 부산 무용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는 초기 시기이며, 이때를 부산 무용이 형성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본격적인 춤 교습의 개시]

1945년 광복이 되던 해 추강(秋剛) 김동민(金棟旻)[1910~1999]이 자택에 경남국악원[후에 민속무용연구소로 개칭]을 개설하여 권번에서 기녀가 아닌, 일반 평민들을 대상으로 춤 교습을 실시하였고 경남국악원의 최초의 사범은 강태홍(姜太弘)으로 「가야금 산조」의 명인이었다.

1947년 이후부터 외국 무용이 서서히 시작되었는데 대표적인 무용가가 김혜성(金慧星)[1920~1988]이었다. 김혜성은 부산 출신으로 부산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며, 발레와 현대 무용을 전공한 부산 최초의 발레리나였다. 현대 무용의 박용호, 발레의 김향촌[1926~1978, 부산에서 발레를 춘 최초의 남성 무용수]이 대신동에 합동연구소를 개설하였고 박이랑, 옥파일, 조말선 등이 교육무용연구소를 개설하여 아동 무용에 전념하였다. 또한 1949년 이인범이 발레연구소를 개설하였으며 1950년 박용호와 옥파일이 각각 부산에서 처음으로 발표회를 열었다.

[부산 춤의 르네상스]

1951년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한국 무용 발표회가 부산 극장에서 열렸다. 공연 제목은 제1회 민속무용연구소 무용 발표회[1부 소품 위주, 2부 4막으로 구성된 극무용]이었다. 1952년에 박성옥이 무용 연구소를 개설하여 박성옥 무용 발표회[두 번째 극무용]를 가졌다. 한편 부산 무용 근대사에 무용 이론 1세대[강이문(姜理文), 1912~1992]가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1953년 임시 수도가 서울로 환도되면서 무용인들의 귀향도 이어졌으나 오히려 이 시기에 부산에서 신인들의 춤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신인으로 김춘방(金春芳)[신무용], 조숙자[발레], 김온경[고전 무용], 김진홍[고전 무용], 황창호[발레] 등이 등장하였으며, 1957년 부산에서 김미화[1922~1984], 황무봉, 정임득이 무용 연구소를 개설하였다. 이렇듯 1950년대의 부산 무용은 한마디로 르네상스라고 할 만큼 다양한 장르의 무용 연구소의 개설, 무용가들의 공연 활동, 무용 평론의 인식, 테마가 있는 기획 공연 등이 시작되었다.

[풍성해진 부산의 춤]

1. 1960년대

1960년 10월 제일 극장에서 푸리마발레단[단장, 김혜성]의 창단 공연이 있었으며 1961년 김진홍의 은방울무용연구소가 개설되었으며 1962년 11월에 손세란 한국예술무용연구소가 개설되었다. 1962년 4월 한국무용협회 부산지부 결성되었는데 9월 다시 부산과 경남 지부의 통합으로 한국무용협회 경남지부가 결성되었다가 1963년 부산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한국무용협회 부산지부로 환원되었고 황무봉이 한국무용협회 부산지부장으로 선출되었다. 한국무용협회 부산지부의 결성은 이전의 개별적인 무용 활동을 조금 더 조직적으로 만들어 내는 힘이 되었다.

1963년에 한성여자초급대학[현 경성대학교]에 체육무용과가 개설되어 이때부터 무용 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무용 교육 또는 무용 활동이 대학 무용 교육의 무용 활동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무용계의 활동으로 1964년 10월 무용 부문 최초로 강이문이 제6회 부산시 문화상[무용]을 수상한 인물이 되었으며, 같은 해 7월에 한국무용협회 부산지부 주최 제1회 전국 초중고등학생 무용 콩쿠르가 개최되어 2012년 현재까지 부산 시민 회관 대극장에서 지속되고 있다.

1965년에 덕수궁에서 개최된 전국 민속 예술 경연 대회에서 부산의 대표 팀의 「동래 야류」가 제6회 대통령상을 수상하였고, 1969년 김영희는 문화공보부 신인 문예상 무용 부문 금상을 수상하였으며, 1969년 김현자[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대한민국 문화 예술상 제1회 무용 부문 신인상[국무총리상]을 수상하여 부산 무용인의 춤 기량을 검증받아 부산 무용의 자질 향상에 일조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부산 무용 정체성에 대해 심혈을 기울인 김동민은 부산의 토속 춤을 재구성하여 무대화하는 데 한몫을 담당하였다.

2. 1970년대

1970년에 문화공보부 예술 창작 지원 공모전에 강이문「산하 억만년」이 당선, 서울과 대구에서 현대 무용 부문으로 공연되었으며, 1972년 9월 19일에 「동래 학춤」이 부산광역시 무형 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고 이는 무용이 문화재로 지정된 최초의 일이다.

1973년에 전국 최초의 시립 무용단인 부산시립무용단이 발족되었고, 1979년 3월 부산여자대학[현 신라대학교에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무용과가 개설되었다. 그리고 한성여자초급대학[현 경성대학교]에서 최초로 무용 미학 강좌가 개설되어 무용 이론의 체계적인 교육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강의는 강이문이 담당하였다. 또한 조숙자는 열악한 부산 발레의 발전을 위해 부산발레단을 1979년에 창단하였으며 이것은 김혜성의 푸리마발레단[1960년]과 황창호의 부산창작발레단[1976년]에 이은 세 번째 부산 발레단이다.

1970년대 역시 부산 무용계는 크게는 한국 무용[전통, 창작 및 재구성], 발레 또는 모던 발레의 이중 구도로 주도되었고 단지 현대 무용의 본격적인 움직임이 없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1970년대의 부산 무용은 점차로 성숙되어 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현대 부산 무용의 근간을 이룬 1980년대 이후의 무용 활동]

1980년대는 한국 전통 무용, 한국 창작 무용, 발레, 현대 무용 등의 장르가 대학 무용학과 개설을 계기로 자연스럽게 독자성이 강조되면서 각기 입지가 확고하게 나타난 시기로 볼 수 있다. 대학의 무용학과가 1979년 부산여자대학교에 개설한 이후 1980년에 부산여자전문대학, 1983년에 동아대학교부산대학교, 1984년에 경성대학교, 1987년에 부산예술고등학교, 1989년에 부산경상전문대학에 개설되었다.

특히 그동안 열악하였던 현대 무용 활동이 그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는데, 하정애가 부산여자대학 무용과에 부임하면서 부산에서의 현대 무용이 본격적으로 재기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뒤이어 남정호[경성대학교], 정귀인[부산대학교], 장정윤[동아대학교] 등이 각각 부산의 현대 무용을 탄탄한 궤도에 올려놓았다.

1985년 하야로비현대무용단[예술 감독, 하정애], 1985년 춤패배김새[예술 감독, 최은희]의 창단을 시작으로 총 16개의 동인 단체가 만들어졌으며 이렇듯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를 아울러 부산 동인 단체의 활동과 그 출신의 안무가들의 개인 활동은 다양하였다. 1995년 부산 최초의 비동인 단체인 트러스트무용단의 탄생은 부산 무용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신진 예술가들의 작업을 위한 모임 방식을 새롭게 만들어 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예술공동체 마르, 연분홍, M-note 등이 대표적인 비동인 단체이다. 동인, 비동인, 개인의 형태로 다양한 창작 활동과 단체 간의 교류 공연, 다른 장르와의 교류 등은 부산 무용계에 활력과 힘을 실어 주었다.

1990년대 후반기와 2000년대까지 이어지는 무용 인구의 감소는 대학의 미달 사태와 동인 단체 활동 부진으로까지 이어졌으며 2011년에 동아대학교 무용학과가 폐과되는 위기에 이르렀다. 부산 무용계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예술 분야의 관심을 끌며 2009년에 출범한 부산문화재단은 문화 예술 교육, 공연, 레지던스[연습실 지원], 문화 바우처 등 폭넓은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어 앞으로의 부산 무용 발전을 도모하는 돌파구가 되어 줄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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