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29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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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脈 |
영어의미역 | Cheongmaek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현라 |
[정의]
부산 지역에 있던 미술 동호인 단체.
[개설]
1920년대 부산 지역은 서양 미술이 들어온 뒤 학습기와 수용기를 거치게 되었다. 1945년 해방 후 부산 지역에는 ‘부산미술협회’ 조직과 ‘부산 미술전[공모전: 1948년, 1949년]’, ‘혁토사’와 ‘토벽’의 움직임과 ‘청맥 동인전’, ‘경남 미술전[공모전]’이 등장하게 된다. 즉 1950년대를 표현 양식을 더듬는 시기라고 한다면, 1960년대는 표현 양식의 변화기라고 할 수 있다.
[설립 목적]
6·25 전쟁 이후 중앙 화단의 최우선 과제는 현대화였다. 그러나 같은 시기의 부산은 중앙 화단과 다른 양상을 보여 주었는데, ‘토벽회’가 추구하였던 현실주의의 맥을 잇고 향토성에서 벗어나 보다 분명한 시대의 리얼리티를 구현하겠다는 목표 아래 청맥을 창단하게 되었다. 즉 이것은 부산 토박이의 정서보다는 시대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하겠다는 미술 이념에 따른 것이었다. 한편 이들은 구체적으로 부산미술협회의 반복되는 연례행사인 ‘3·1절 기념전’과 ‘8·15 경축전’에 출품하는 회원들의 매너리즘에 염증을 느껴 보다 참신함과 또 다른 발언을 해 보려고 모였다.
[변천]
토벽회의 미술 운동이 2년을 넘기지 못하자 1956년 4월에 청맥이 결성되었다. 청맥도 토벽회처럼 20~30대 초반의 청년들로 구성되었다. 즉 추연근, 하인두, 김영덕 등 세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 추연근은 겹치고 반복되는 독특한 선적 표현으로써, 하인두는 추상 표현주의적인 경향으로써, 김영덕은 견고한 변형적 표현으로써 각각 강한 개성을 갖고 출현하였다.
1957년 3월 제2회 전시회 때에는 ‘토벽회’ 동인이었던 김경, 김영교, 배해윤이 가담하면서 내실을 다졌다. 같은 해 11월 제3회 전시회 때에는 추연근, 하인두, 민백향, 이석우의 동양화와 심봉섭의 조각으로 합심하였고, 제4회 전시회 때에는 추연근, 민백양, 이석우, 배해윤, 진병덕, 김원, 김천옥 등이 합심하였다. 그러나 청맥은 4차례의 전시회를 갖는 동안 회원의 증감이라는 변화 외에 조형 이념이나 표현의 어떤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이후 회원 일부는 서울로 떠나고, 여러 가지 생활 여건 등에 따라 1959년에 해산되었다. 청맥의 회원들은 주로 군록회로 이어졌으며, 일부는 부산판화회 탄생의 발판이 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제1회 청맥 동인전은 1956년 4월에 미화당 백화점 별관 문화 회관에서 개최되었다. 이때 출품작은 김영덕의 「소년 A」, 「자화상」, 「황토」, 하인두의 「포옹」과 「해변 화실」, 추연근의 「해안선」 등이었다. 제2회 청맥 동인전은 1957년에 미화당 백화점 별관 문화 회관에서 열렸으며, 제3회 청맥전은 같은 해에 역시 미화당 백화점 별관 문화 회관에서 열렸다. 제4회 청맥 미전은 1958년에 미화당 백화점 별관 문화 회관에서 개최되었다.
[의의와 평가]
청맥은 구상적 표현주의 양식으로 6·25 전쟁 후의 시대를 증언하고자 한 대표적인 모임이다. 청맥에서 활동한 김영덕의 「소년 A」[후에 「전장의 소년」으로 알려짐]나 「세 여인」은 1950년대 전후 한국 미술에서 독특한 위치를 지닌다. 전후 추상화의 경향과도 다르고 서정적인 리얼리즘이나 국전 풍의 관습적 구상 미술과도 구별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화풍을 비판적 리얼리즘이라고 하는데, 비판적 리얼리즘 정신은 습지(濕地)동인이나 일선(一線) 작가들에 의해 부산 화단에 이어졌다.